
얼마 전 지인 모친의 빈소에 다녀왔다. 당시 나는 자정이 넘은 시각에 두 시간 넘게 차를 몰아 빈소에 도착했다. 다른 지방으로 이동하는 일정이 있어서 그 시간이 아니면 도저히 갈 수 없는 상황이었다. 불 꺼진 빈소는 고요했다. 당황한 나는 상주에게 전화를 걸었으나 통화 연결음만 길게 이어졌다. 조문객을 맞느라 지쳐 잠들었나 싶어 휴대전화를 닫았다. 나는 홀로 빈소에 들어와 처음 보는 고인의 영정 앞에서 어색하게 향을 사르고 큰 절을 두 번 한 뒤 방명록에 이름을 적었다. 지인에게 얼굴도장을 찍지 못한 게 마음에 걸려 문자 메시지까지 따로 남겼다. 빈소에서 나올 때 문득 회의가 들었다. 장례는 과연 누구를 위한 의식일까.
빈소의 진짜 주인공은 상주·유족
고령화·저출생 탓 썰렁해질 빈소
전통적 조문 계속될 수 있겠나
삶만 아닌 죽음도 복지 논의해야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하나하나 기억하기 어려울 만큼 많은 빈소에 들렀다. 조부모·외조부모·모친·장인·동생 장례식의 상주와 유족으로서도 여러 차례 빈소를 지켰다. 빈소의 풍경은 어느 곳이든 대체로 비슷하다. 고인은 빈소의 주인공이면서도 주인공이 아니다. 진짜 주인공은 상주와 유족, 즉 산 사람이다. 조문객은 고인에 관해 아는 바가 전혀 없어도 산 사람과의 관계 때문에 시간을 쪼개 빈소에 들른다. 산 사람은 슬픔에 잠길 여유도 없이 조문객을 상대하느라 바쁘다. 고인을 추모하는 자리인데, 정작 고인은 산 사람에 밀려 뒷전이다.
앞으로는 이런 빈소의 분위기를 보기 힘들어질 테다. 조문객 숫자가 과거보다 눈에 띄게 줄어들었기 때문이다. 빈소를 지킬 사람이 줄어든 탓이다. 30년 전 조부 장례식 때 빈소 분위기는 마치 동네잔치를 방불케 했다. 슬하에 오지랖 넓은 일곱 남매를 둔 덕분에 사흘 내내 찾아오는 조문객이 넘쳐났다. 대학병원 장례식장 빈소 세 곳을 조문객으로 꽉 채웠다. 반면 지난해 외조모 장례식 때 빈소 분위기는 썰렁했다. 슬하에 여섯 남매를 뒀지만, 셋이 먼저 세상을 떠났다. 남은 셋에게 얼굴도장을 찍으려고 빈소를 찾은 조문객은 많지 않았다. 출산율이 세계에서 가장 낮은 대한민국에서 장례 문화가 과거처럼 유지될 수 없음은 자명한 미래다. 이미 상조회사가 버티지 못하고 폐업한 뒤 선급금을 ‘먹튀’하는 사례가 사회문제이지 않은가.
점점 늘어나는 평균 수명도 기존 장례 문화의 종말을 알리는 신호다. 우선 고인의 지인이 빈소를 찾을 가능성이 별로 없다. 먼저 세상을 떠났거나 거동이 불편한 사람이 대부분일 테니 말이다. 조문객 대다수는 상주와 유족의 직장 동료이거나 일로 엮인 사람이다. 그런데 부모가 평균 수명 이상을 살고 세상을 떠나면 남은 자녀의 나이는 50~60대가 된다. 그 나이면 자녀는 퇴직했을 확률이 높고, 부모 장례식에 직장 동료로서 빈소에 찾아올 조문객은 많지 않다. 몇 년 전 장인 장례식을 치렀을 때 내 손님이 꽤 많았는데 대부분 일로 만난 사이였다. 직장 없이 글을 쓰는 내가 언젠가 부친 장례식을 치른다면 과연 장인 장례식 때만큼 조문객을 불러 모을 수 있을까. 반의반도 어림없을 테다.
이제 더 찾아오지도 않을 조문객을 민망하게 기다리는 삼일장을 고집해야 할 필요가 있는지 고민해봐야 할 때다. 조문객이 줄면 당연히 부의금도 줄어든다. 예전처럼 부의금만으로는 장례비용을 감당할 수 없고, 남은 부담은 상주와 유족의 몫이다. 2년 전 동생 장례식을 치렀을 때 빈소를 따로 차리지 않았는데도 이런저런 비용을 합치니 몇백만원이나 나왔다. 이런 게 과연 고인이 바라는 모습일까. 중요한 건 빈소를 차리는 기간이 아니라 얼마나 진심으로 고인을 애도하느냐가 아닐까. 고인을 알지도 못하는 조문객을 기다리고 근조화환 개수를 헤아리며 체면을 차리는 게 무슨 의미가 있는지 의문이다.
앞으로는 이런 이야기가 한가하게 들릴지도 모르겠다. 1인 가구 비율이 점점 높아져서 이젠 국민 상당수가 고독사와 무연고 장례를 고민해야 할 처지에 놓여 있으니 말이다. 지금 당장 1인 가구가 아니어도 안심할 수 없다. 한 가구의 마지막 모습은 1인 가구일 가능성이 크니 말이다. 내 가족은 아내 한 명뿐이다. 둘 중 누군가는 먼저 세상을 떠날 것이다. 남은 한 명은 늙고 지친 몸으로 여생을 홀로 보내야 한다. 언제 다가올지 모르지만 확실한 미래다. 나를 먼저 보낸 아내, 혹은 아내를 먼저 보낸 내가 쓸쓸하게 죽음을 맞이할까 봐 두렵다. 이젠 삶뿐만 아니라 죽음에도 복지를 논의할 때 아닌가 싶다.
정진영 소설가

![[아빠 일기] 포기와 수용 사이](https://www.usjournal.kr/news/data/20251120/p1065621546851028_778_thum.jpeg)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