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알려주는 존재, 귀신

2025-11-19

고전 설화에서 귀신은 대개 사무치는 원한이나 억울한 사정이 있어 사람을 찾아온다. 이승에서 풀지 못한 응어리를 누군가가 대신 처리해주기를 바라면서. 이때 귀신은 어떤 문제를 해결하겠다는 특정한 목적을 가지고 말을 하러 온다. 그러나 말을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저 나타나기 위해서, 누군가의 곁으로 다가가기 위해서 찾아오는 귀신도 있다.

임솔아의 단편소설 ‘사랑보다 조금 더 짙은 얼굴’(문학동네 2025년 가을호)의 귀신이 바로 그런 귀신이다. 첫 만남은 이랬다. 고시원에 살던 무더운 한여름밤, 문득 추운 공기가 느껴져 잠에서 깨자 침대 옆에 귀신이 서 있었던 것. 금세 사라졌지만 귀신은 종종 새로운 생김새로 모습만 바꾸어 다시 나타나곤 한다. 어떨 때는 긴 머리카락을 묶고서, 어떨 때는 늙은 노인으로, 어떨 때는 작은 꼬마로. 하지만 화자는 언제 보아도 그가 귀신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 때로는 헷갈리기도 하고, 때로는 잊어버리기도 하지만, 연인과 함께 자는 침대에 나란히 앉거나 잠들기도 할 만큼 귀신은 어느새 일상에 깊이 들어와 있다.

그러고 보면 사람과 귀신의 관계에는 이상한 데가 있다. 고인의 영혼을 불러들이는 초혼 의식을 제외한다면 귀신을 만나고 싶어서 만나는 사람은 없다. 우리는 귀신을 예상치 못한 순간에 예상치 못한 방식으로 맞닥뜨린다. 만남의 시간, 장소, 방식, 내용을 정하는 쪽은 사람이 아니라 귀신이다. 그렇다면 이렇게도 말해볼 수 있을까. 내가 앞서서 인식하고 접근하고 의미를 부여하는 관계가 아니라 상대가 먼저 다가오고 말을 걸고 멀어지는 관계. 내가 원한다고 해서 요구할 수 있는 관계가 아니라 그저 기다리거나 받아들여야 하는 관계. 그러므로 귀신은 내 안에 있으면서도 내 밖에 있는 존재이다. 나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나와 연루되어 있는 존재. 그런 모순이 사람과 귀신의 사이에 있다.

그런데 이 소설의 화자는 이 수동적인 상태를 겁내지도 답답해하지도 않으면서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있는 것 같다. 마치 그 상태가 편안하고 좋아서 머무르고 싶은 것처럼. 왜일까. 어쩌면 인간관계와는 달리 만남에서 필요한 최소한의 수단, 이를테면 목소리를 내어 대화를 하고, 서로의 상태와 기분을 체크하고, 자신을 설명하는 것조차 필요하지 않기 때문일까. 이렇게 누군가가 존재만으로 다가온다면,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고 그저 나타나기만 한다면, 다시 말해 내부로부터 무언가를 끌어내야 하는 능동성을 요구하지 않는다면, 그 관계는 불가피하고 통제불가능한 것을 묵묵하게 받아들이는 연습을 시키는 것일지도 모른다. 보고 싶을 때 볼 수 없고, 그리워도 부를 수 없지만, 찾아오면 맞아주어야 하고, 사라지면 보내주어야 하는 관계. 만약 이런 것이 관계라면, 내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고 해서, 언젠가는 떠나간다고 해서, 너무 괴로워하지 않아도 된다고 가르쳐주는 것일지도 모른다.

긴 시간이 흘러 할머니가 된 화자는 평생을 함께했던 연인 윤미의 장례를 치르고 오랜만에 귀신을 다시 마주한다. 칫솔꽂이에 있는 연인의 칫솔이나 잠이 안 오면 바꾸곤 했던 베개를 보며 빈자리를 느끼는 순간 나타난 귀신은 떠나버린 연인을 대신한다기보다 사랑하는 사람의 부재를 부드럽게 받아들이게 한다. 타인은 그 사람이 거기에 존재한다는 것을 알려주지만, 귀신은 내가 여기에 존재한다는 것을 알려주기 때문이다. 함께 걷고 잠들고 서로를 돌보았던 시간이 사라져도, 멀리서 밝게 빛나는 야광 버섯처럼 빈약하고 희미한 것이 남아 있다는 것을 알려주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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