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자보수 등 이유로 대금지급 미뤄…중소업체 자금난 우려

2025-03-08

■ 시공현장 유보금 설정 관행 문제점 진단, 개선 방안

준공 후 기성 지급 등 명시

유보금 기간 3~6개월 ‘최다’

원활한 자금조달에 큰 걸림돌

경영난에 문 닫는 업체 수두룩

부당특약 판단돼도 계약은 유효

불공정 계약 막을 후속입법 필요

시공현장에서 원사업자가 수급사업자에게 하도급대금의 일부를 지급하지 않고 유예하는 ‘유보금’ 관행을 개선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불합리한 유보금 설정에 따른 수급사업자의 어려움을 해소하기 위해 제도적 안전장치를 마련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 수급사업자 재정건전성 악화

관련업계에 따르면 원사업자는 하자보수, 준공대금 정산, 추가공사대금 정산 등을 이유로 하도급대금의 일부를 수급사업자(하도급업체)에게 지급하지 않고 묶어두는 경우가 많다. 이 같은 유보금 관행은 하도급 계약 단계에서 거래상 우월적 지위에 있는 원사업자의 요구를 수급사업자가 거절하기 어려운 상황에서 비롯된다.

다수의 중소 시공업체는 무리한 유보금 설정이 수급사업자의 재정건전성을 악화시키고 경영상 어려움을 초래하는 요인이 된다고 보고 있다. 일각에서는 고질적인 유보금 관행이 최근 급격하게 증가하고 있는 건설사 폐업을 가속화 시킬 수 있다는 우려를 표하기도 한다.

실제로 대부분이 대기업인 원사업자는 하자보수 비용이 들어갈 수 있다는 등의 이유를 내세워공사대금의 일부를 지급하지 않는 경우가 많다. 이로 인해 중소시공업체는 원활한 자금조달에 어려움을 겪거나 현장 운영 경비 부족으로 근로자의 노임을 제날짜에 지급하지 못하기도 한다. 일부 사업장의 경우 유보금 비율이 지나치게 높고, 수급사업자의 회사 경영에 반드시 필요한 돈을 장기간 지급하지 않는 경우도 있다. 이 때 수급사업자는 극심한 경영난을 호소하며 회사 문을 닫는 일까지 벌어진다.

자금 경색에 따른 어려움은 수급사업자에만 그치지 않는다. 수급사업자가 자금난에 부딪혀 자재 구입이나 장비 대여에 들어간 돈을 제때 주지 못하는 경우 해당 거래처 역시 연쇄적인 피해를 입게 된다.

이 같은 문제를 해소하기 위해 중소 시공업체를 중심으로 유보금 관행을 하루빨리 개선해야 한다는 의견이 폭넓은 공감을 얻고 있다. 하지만 원사업자 지위를 지닌 대형 건설사의 입장은 사뭇 다르다. 다수의 대형 건설사는 시공품질 확보와 철저한 하자보수 등을 위해 합리적인 유보금 설정이 불가피하다는 주장을 펼치고 있다.

■ 하도급사 44%, 유보금 경험

건설 유관단체 및 연구기관의 여러 분석과 조사는 시공현장의 뿌리 깊은 유보금 관행을 여실히 보여준다. 지난 2023년 8월 대한전문건설협회 설문조사에 따르면 최근 3년간 수급사업자의 44%가 유보금 설정을 경험했다고 응답했다.

같은 해 대한건설정책연구원의 실태조사도 이와 맥을 같이 하고 있다. 해당 조사를 살펴보면 유보금 설정 비율은 기성금액 대비 5~10% 미만이 33.1%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했으나 20% 이상의 경우도 14.9%로 나타났다. 유보금 설정기간은 3~6개월 미만이 38.0%로 가장 많았고 1년 이상인 경우는 11.6%로 조사됐다.

같은 해 공정거래위원회는 원사업자를 대상으로 실시한 하도급거래 실태조사에서 건설업계 내 하도급대금의 약 10% 미만의 유보금이 설정되고 있는 것을 확인했다. 이와 관련, 공정위는 기성금 지급유예 약정 등 수급사업자가 대금을 지급받을 권리를 부당하게 제한하는 약정을 설정했을 때 이를 부당특약으로 규율하고 있다.

구체적 사례를 보면, T건설사는 2022년 2월 하도급업체와 계약을 체결하면서 별도의 약정을 설정했다. 주된 내용은 원사업자가 기성 지급을 유보할 수 있으며, 수급사업자는 유보금액에 대한 일체의 금융비용을 청구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원사업자인 B사가 2021년 하도급업체와 체결한 계약도 유보금 설정에 대한 내용을 담고 있었다. B사는 수급사업자가 하자이행보증서를 제출한 후에 계약이행보증금을 반환한다는 약정을 계약서에 명시했다.

이에 앞서 J건설은 2020년 기성금의 30% 또는 20%를 준공 후 2개월 이내에 수급사업자에게 지급한다는 내용을 하도급 계약서에 포함시켰다. 또한 P사는 2017년 체결한 하도급계약에서 기기 대금의 5%를 성능보증 명목으로 유보하는 내용을 계약서에 명시했다. 같은 해 S건설은 기성금의 10%를 잔금 수령 시 지급한다는 약정을 체결했다. 공정위는 이 같은 부당특약에 대해 모두 시정명령을 내렸다. 법원 또한 기성금의 일부를 준공 후 지급하거나 납품 이후 예정된 후속 업무가 없음에도 성능보증 명목으로 대금 지급을 유보하는 약정을 부당특약으로 판단하고 있다.

■ 공정위 고시·예규 개정 추진

공정위는 유보금 설정에 관한 그간의 심결례와 법원 판례를 바탕으로 부당특약 고시의 개정을 추진하고 있다. 이와 관련, 최근 공정위가 행정예고한 고시 개정안은 기성금, 준공금에 대한 지급유예 약정 등 수급사업자가 하도급대금 등을 받을 수 있는 권리를 제한하는 약정을 부당특약으로 명시했다. 해당 고시는 하도급법 및 하위법령 규정에 따라 하도급거래에서 설정이 금지되는 부당특약의 유형을 명확하게 정하는 데 목적을 두고 있다.

공정위는 이번 고시 개정을 통해 하도급법에서 보호하는 수급사업자의 하도급대금 등을 받을 수 있는 권리를 보장하는데 주력할 방침이다. 이로써 수급사업자의 피해를 예방하고 원·수급사업자 간 공정거래질서 확립에 기여하는 효과를 기대하고 있다. 나아가 공정위는 유보금 설정의 구체적인 위법성을 판단할 수 있도록 부당특약에 해당할 수 있는 유형이나 위법성 판단기준을 명시하는 ‘부당특약 심사지침(공정위 예규)’의 개정도 함께 추진 중이다.

공정위가 유보금 설정에 관한 부당특약의 예시로 검토하고 있는 것은 크게 4가지다. 먼저 기성금 일부의 지급을 공사 준공 또는 준공 후 일정 기간까지 연기하는 약정을 들 수 있다.

또한 수급사업자가 하자보수보증의무를 이행하지 않을 경우, 원사업자가 공사대금의 지급을 유보할 수 있게 하면서 묶어둘 수 있는 공사대금의 범위나 기간이 하자보수보증금액이나 하자담보책임기간를 초과할 수 있도록 한 약정도 부당특약에 해당한다. 여기에는 유보할 수 있는 공사대금의 범위나 기간을 정하지 않은 경우도 포함된다.

아울러 공정위는 수급사업자의 귀책사유가 없는 경우까지 포함해 기성금 또는 준공금에 대한 정산 지연 시 공사대금의 지급을 포괄적으로 유보할 수 있도록 정하는 약정도 부당특약으로 간주할 계획이다.

이와 함께 원사업자가 수급사업자로부터 받은 계약이행보증금은 공사완료 후 반환해야 함에도 계약이행보증금 반환시기를 이와 무관한 하자보수이행증권 제출 여부와 연계시키는 약정도 부당특약에 포함시킬 방침이다.

■ 부당계약 무효 위한 입법 필요

그렇지만 유보금 설정이 공정위 고시에 따라 부당특약으로 판단되더라도 원사업자와 수급사업자간의 계약은 유효하게 유지되는 한계가 존재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유보금 설정으로 하도급업체가 금전적으로 큰 어려움을 겪더라도 행정적으로 그 피해를 입증하기는 쉽지 않으며 별도의 민사소송을 제기해 권리구제를 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에 하도급법의 경우에도 국가계약법이나 지방계약법, 건설산업기본법 등과 같이 부당특약을 무효로 하는 후속적인 입법조치가 필요하다는 주장이 제기되고 있다.

홍성진 대한건설정책연구원 연구위원은 최근 내놓은 브리핑 자료에서 “공정위가 유보금 설정에 관한 문제점을 해소하기 위해 부당특약 고시 개정을 추진하는 것은 중소기업의 애로 사항을 개선할 수 있는 적극 행정으로 높이 평가할 수 있다”고 밝혔다. 아울러 “고시 개정이 이뤄질 경우 비상경제 체제하에서 중소기업의 원활한 공사대금 확보에 큰 도움을 줄 것”이라고 기대를 나타냈다.

그러나 홍 위원은 “하도급법에서 부당특약을 금지하고 있으나 그 효력에 대해서는 별도의 규정을 두고 있지 않기 때문에 원사업자와 수급사업자간의 계약은 유효한 것으로 인정된다”며 “부당특약을 무효로 하는 추가 입법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이에 더해 시공현장 마다 유보금에 대한 범위와 구체적인 금액이 다르다는 점을 고려해야 한다는 의견도 대두하고 있다. 유보금 설정에 대한 불합리성 판단과 관련규정 위반 등을 놓고 크고 작은 다툼이 생길 수 있으므로 이에 대한 명확한 기준을 마련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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