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티 듀카키스, 생애 말년에 치매 앓아
선거운동 당시 흑색 선전에 시달리기도
유대인으로서 홀로코스트 기억에 동참
1988년 미국 대통령 선거에 민주당 후보로 출마한 정치인 마이클 듀카키스(91)의 부인 키티 듀카키스 전 미국 홀로코스트 기념위원회 위원이 88세를 일기로 별세했다.
22일(현지시간) AP 통신에 따르면 키티는 전날인 21일 밤 매사추세츠주(州) 브루클린의 자택에서 남편을 비롯해 온 가족이 지켜보는 가운데 숨을 거뒀다. 고인은 오래 전부터 치매를 앓아 온 것으로 전해졌다. 유족을 대표해 고인의 아들은 “어머니는 좀 까칠한 측면도 있지만 재미있는 분이셨다”며 “어머니와 아버지는 60년 넘게 서로를 깊이 사랑하며 해로하셨다”고 말했다.

키티는 1936년 12월 매사추세츠주 케임브리지에서 태어났다. 그의 조부모는 러시아계 유대인이다. 아버지는 바이올린 연주자로 보스턴 심포니 오케스트라 단원, 보스턴 팝스 오케스트라 부지휘자 등을 지냈다. 키티는 겨우 21세인 1957년 결혼하고 아들까지 출산했으나 성격 차이를 극복하지 못하고 4년 만에 이혼했다. 이후 그는 고교 시절부터 알고 지낸 마이클 듀카키스와 1963년 재혼했는데 부부는 두 딸을 낳았다.
마이클은 1955∼1957년 주한미군에서 육군 통신병으로 복무하고 전역 후 명문 하버드 대학교 로스쿨을 졸업한 전도유망한 청년이었다. 키티와 결혼한 1963년 민주당 소속으로 매사추세츠 주의회 하원의원에 당선되며 정계에 첫발을 내디뎠다. 마이클이 1975∼1979년과 1983∼1991년 총 세 차례에 걸쳐 매사추세츠 주지사로 일하는 동안 키티는 남편을 위한 내조에 충실했다. 다만 1979년 홀로코스트 기념위원회 위원이 돼 1987년까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나치 독일에 희생된 유대인을 기억하는 사업에 관여했다. 이는 민주당 소속 지미 카터 대통령이 키티가 유대인이란 점에 착안해 위원직을 제안하며 성사됐다.
1988년 마이클은 민주당 대선 후보로 지명됐다. 경쟁자는 공화당 로널드 레이건 행정부에서 8년간 부통령을 지낸 조지 W H 부시 후보였다. 선거운동 기간 키티는 남편의 유세에 빠지지 않고 참여하며 활기찬 지지 연설을 했다. 당시 공화당은 네거티브 전략을 동원했는데 키티가 과거 베트남 전쟁 반전운동에 참여한 것도 표적이 됐다. 어느 공화당 상원의원이 “듀카키스 후보의 부인 키티가 1970년 성조기를 불태우는 모습을 담은 사진을 본 적이 있다”고 주장한 것이다. 이는 근거없는 헛소문에 불과했으나 보수 성향 유권자들이 등을 돌리는 계기가 됐다.

부시와의 대선 후보 TV 토론회도 불리하게 작용했다. 사회자는 사형제 반대론자인 마이클을 향해 “당신의 부인 키티가 성폭행을 당하고 살해됐어도 그 범인의 사형에 반대하겠는가”라는 질문을 던졌다. 이에 마이클이 “그래도 반대할 것”이라고 답하자 부시는 “저렇게 가족애도 없는 냉혹한 사람이 어찌 대통령이 될 수 있겠느냐”고 공세를 폈다. 결국 1988년 11월 대선은 부시의 압승으로 끝났다.
남편과 함께 백악관에 입성하려던 계획이 좌절된 뒤 키티는 심한 우울증을 앓았다. 술을 과하게 마시다가 알코올 중독 치료를 받기도 했다. 훗날 우울증에서 벗어난 키티는 약물 중독 문제에 관심을 갖고 정부와 지역사회, 의료계가 약물에 의존하는 사람들을 돕는 데 더 많은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고 역설했다. 선거 이듬해인 1989년 대통령에 취임한 부시는 과거 홀로코스트 기념위원회에서 오래 일한 키티를 다시 위원으로 위촉했다. 이를 두고 대선 과정에서 키티가 흑색 선전의 표적이 된 점을 사과하고 화해하려는 의도라는 풀이가 나왔다.
김태훈 논설위원 af103@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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