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4년 9월26일, 민청학련 사건으로 구속된 지학순 주교의 석방을 촉구하는 ‘순교자 찬미 기도회’가 서울 명동성당에서 열렸다. 기도회는 사제들의 첫 시국선언이었고, 반유신 운동의 기폭제가 됐다. 사제들은 시국선언에서 “한 사람의 집권자가 긴급명령이라는 권력남용으로 국민의 존엄성을 짓밟았다”고 비판하며 유신 철폐, 민주헌정 회복, 국민 기본권 존중을 촉구했다.
이 시국선언 후 사제단은 유신·군부 정권의 삼엄한 감시망을 뚫고 고난받는 자들의 언로를 마다하지 않았다. 5·18민주화운동 때 유가족들을 품으며 광주의 한을 달랬던 고 김수환 추기경, 1987년 경찰의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 조작·축소를 폭로하며 6월 항쟁 방아쇠를 당겼던 김승훈 신부. 국가가 부재했던 세월호·이태원 참사, 쌍용차 투쟁 현장에서 희생자들의 눈물을 닦아준 것도 사제들의 기도였다.
한 사회가 퇴행할 때 종교 지도자의 말은 중요하다. 양심·정의의 실현이라는 종교 본연의 역할이 공동체의 미래에 큰 영향을 미친다. 그 점에서 50여년 전 사제단의 첫 시국선언문은 지나간 시대의 이야기가 아니다. 단어만 ‘내란’으로 바꾸면 2025년 3월의 이야기가 된다.
유흥식 추기경이 지난 21일 대통령 윤석열 탄핵을 촉구하는 영상담화를 냈다. 12·3 내란 후 사제 등의 시위 참가와 성명은 있었지만, 종교 지도자로선 첫 공개 탄핵 목소리다. 교황청 성직자부 장관인 유 추기경은 “우리 안의 정의와 양심의 소리를 듣는다면 더 이상 지체할 이유가 없다”며 헌재의 조속한 선고를 요청했다. “사회 지도층이 법마저 지키지 않는다면 우리 사회는 어디로 가겠는가”라고 한 그의 개탄은 “정의에는 중립이 없다”는 말로 이어졌다.
이 말에서 단테의 <신곡>에 나온 “선과 악이 싸울 때 중립을 지키는 자에겐 지옥의 가장 뜨거운 곳이 기다리고 있다”는 말이 생각났다면 과한 유추일까. 그렇지 않을 것이다. ‘윤석열 내란’은 대한민국 시민들에게 하루하루 불안하고 힘든 지옥과 다름없고, 그 지옥의 불은 아직 꺼지지 않았다. 민주주의와 정의를 회복하는 마지막 양심이 ‘윤석열 파면’이라는 유 추기경 호소를 헌재는 외면하지 말아야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