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기술이 미래다] 〈164〉한국 국적 세계 22번째 과학위성 탄생

2025-06-10

韓 최초 과학위성 ‘우리별 1호’ 발사 성공…우주시대 개막

“실패냐 성공이냐!” 숨막히는 순간이었다.

1992년 8월 11일 오전 8시 8분(한국시간) 남미 프랑스령 기아나 쿠루 우주기지 발사장.

통제센터에서 발사 10초를 알리는 카운트다운을 시작했다.

“10 … 3, 2, 1, 0 발사!”

그 순간 우리별 1호를 실은 로켓이 지축을 흔드는 굉음과 함께 선홍색 불꽃을 내뿜으며 우주로 힘차게 솟아올랐다.

우리별 1호는 발사 1분 28초 후 보조 로켓을 분리하고 3분 19초 후 1단계 로켓 추진을 완료, 본체에서 떨어져 나갔다. 3분 27초 후 2단계 추진 로켓이 점화했고, 3분 36초 후 위성 보호를 위해 씌운 탑재실 덮개가 본체에서 떨어져 나갔다.

19분 9초가 지나면서 로켓은 주탑재물인 위성을 분리한 후 우리별 1호를 궤도에 올리기 위해 방향을 바꿨다. 발사 23분 36초 후 우리별 1호는 함께 실린 S80T 위성과 로켓으로부터 각각 분리돼 단독 비행에 나섰다.

우리별 1호는 무게 48.5㎏, 크기 35.2× 35.6×67㎝의 초소형 과학위성이었다.

발사 30여분이 지난 오후 8시 37분께 통제지휘관이 “모든 위성이 정상적으로 궤도에 진입했다”며 공식 선언했다.

“한국의 키트셋(우리별 1호의 영어 명칭)이 로켓에서 분리됐습니다!”

한국 국적의 세계 22번째 과학위성이 탄생하는 역사적인 순간이었다.

현장에서 숨죽이며 결과를 기다리던 김진현 과학기술처 장관과 최순달 한국과학기술원(KAIST) 인공위성연구센터 소장 등 일행은 두 손을 번쩍 들고 환호했다.

“와, 성공이다!”

이날 쿠루 우주기지 프레스센터에는 세계 20여개국 300여명의 과학자, 언론인, 외국 참관인 등이 참석해 한국 최초로 성공한 우리별 1호 발사를 축하했다. 그 자리에는 프랑스 위베르 퀴리앵 연구기술부 장관도 참석했다.

김진현 장관의 말.

“우리 참관단은 8월 8일 출국했습니다. 퀴리앵 장관을 10일 프랑스 파리 공항에서 만나 옆자리에 앉아서 현지로 갔어요. 우리별 1호 발사가 성공한 후 다시 파리까지 함께 와서 헤어졌습니다.”

김진현 장관은 위성이 제 궤도에 진입하자 “한국 국적의 위성을 보유하게 돼 대단히 기쁘다”고 소감을 밝혔다.

“세계 강대국들의 독무대인 우주항공 분야에 한국이 이제 첫걸음을 내디뎠습니다. 그러나 갈 길이 멉니다. 인공위성 제작은 첨단 과학기술이 모여 이룬 과학기술의 꽃입니다. 우리별 발사를 계기로 우주항공 정책을 종합 수립해야 합니다. 앞으로 민간과 정부 합동으로 가장 효과적인 계획을 수립하겠습니다. 빠른 시일 안에 우주항공 전문가들과 논의하고 우주항공진흥법을 손질해서 우주항공 진흥의 기반을 구축토록 할 계획입니다.”

우리별 1호 개발 총책임자인 최순달 박사도 감격을 감추지 못했다.

“처음 하는 일이어서 여러 법적·제도적으로 어려움이 많았지만 과학기술처, 체신부 등 관계 부처의 적극적인 지원과 대학생들이 사명감으로 이 일에 매진한 덕분에 이번 발사가 성공했습니다. 이번 위성 발사를 계기로 종합적인 우주개발 계획을 수립해야 합니다. ”

우리별 1호가 발사에 성공하자 노태우 대통령은 즉시 축하 메시지를 발표했다.

“친애하는 국민 여러분! 저는 오늘 우리나라 첫 인공위성 우리별 1호를 하늘에 띄우게 된 기쁨을 국민과 함께 나눕니다. 방금 지구 맞은편에서 저녁 하늘 한가운데로 힘차게 솟아오른 우리 과학위성의 찬연한 불꽃은 겨레의 반만년 역사에 우주시대가 새롭게 열렸음을 알리는 서광이고, 우리나라 과학기술 수준을 세계에 알리는 쾌거입니다.”

노 대통령은 현지로 전화를 걸어 최순달 박사와 통화하며 연구진의 노고를 치하했다.

▷노 대통령= 먼저 발사 성공을 국민과 함께 축하합니다.

▷최 박사= 대단히 감사합니다.

▷노 대통령=그동안 애쓴 최 박사와 연구진 등 참여하신 모든 분께 치하를 보냅니다. 여러분의 노고와 국민의 정성 어린 뒷바라지가 함께 이룩한 경사입니다. 이제 우리나라도 우주 시대를 열었습니다. 이번 발사에서 가장 어려웠던 점은 무엇이었습니까?

▷최 박사= 처음 우리가 우주산업을 하는 일이어서 법적인 문제와 제도적인 문제 등이 있었지만 지나고 보니 어려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과학기술처, 체신부, 한국과학재단(현 한국연구재단)이 연구비 지원을 원활하게 해서 이번 일을 성사했습니다.

▷노 대통령=이번이 처음인데 앞으로 계획은 무엇인가요?

▷최 박사= 내년에도 소형 위성 발사를 계획하고 있습니다. 가능하면 국산품을 더 많이 사용해서 기능이 더 좋은 위성을 만들려고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다.

최순달 박사의 회고록 증언.

“대통령과 통화를 끝내고 나자 숨 막히는 긴장과 불안감이 일순간에 날아가 버리고 내 생애 최고의 순간이라는 행복과 감동이 복받쳤다. 그 순간의 감격과 환희를 어떻게 설명할 수 있고 어떻게 입증할 수 있겠는가. 우리별 1호를 궤도에 올리기까지 겪어야 했던 온갖 고난과 역경들이 영화 필름처럼 머릿속에서 돌아갔고 두 눈에 이슬이 맺혔다.”(48년 후 이 아이는 우리나라 최초의 인공위성을 쏘아 올립니다)

정부는 우리별 1호 발사 현장에 참관단 5명을 파견했다. 김진현 과학기술부 장관을 단장으로 해서 최순달 KAIST 인공위성연구센터 소장, 이종원 과기처 연구개발조정실장, 홍재학 항공우주연구소장, 김범준 군(서울과학고 2년) 등이었다. 김 군은 1992년 독일에서 열린 제4회 국제정보올림피아드에 한국 대표로 참가해 금메달을 수상했다. 김 군은 KAIST를 졸업하고 우아한형제들 대표를 거쳐 현재 네이버 최고운영책임자(COO)로 재직하고 있다.

우리별 1호가 발사에 성공한 그날 저녁 현지에서 한국의 인공위성 보유국을 축하하는 파티가 열렸다. 이튿날인 12일에는 발사를 담당한 프랑스 아리안 스페이스사 측이 한국 참관단과 기술진을 위해 관광을 주선했다. 당시 관광지는 악마의 섬이었다. 이 섬은 영화 빠삐용의 무대로 쓰인 형무소였다.

관광지로 가던 도중 한 미국인이 최순달 박사에게 다가와 축하 인사를 했다.

“위성 발사 성공을 축하합니다.” “감사합니다.”

알고 보니 그 미국인은 세계적인 대형 인공위성 제작사인 미국 록히드 마틴사의 사장이었다. 그런 회사 사장이 우리별 1호 발사를 축하해 주는 마음이 무척 고마웠다. 그는 최 박사에게 성공 소감을 물었다.

“지금 내 심정은 생애 처음으로 중고 자동차를 갖게 된 기분입니다. 부자가 벤츠를 타다가 다른 벤츠를 한 대 더 사는 것보다도 몇 백 배 더 기쁘고 감격스럽습니다.”

“그 마음 이해합니다.”

우리별 1호 발사 11시간 27분 뒤인 8월 11일 오후 7시 35분. 대덕연구단지 내 KAIST 인공위성연구센터 지상국에서는 비명 같은 환성이 터졌다. 안도와 기쁨의 환호였다. 우리별 1호와 첫 교신을 한 것이다.

교신 6분 전인 오후 7시 29분 5명의 연구원이 첫 교신을 하기 위해 컴퓨터 단말기를 두드렸다. 이를 천성순 KAIST 원장 등 관계자 20여명이 숨죽인 채 교신을 기다렸다.

우리별 1호가 한반도 상공을 지나는 시간을 짧게는 10분, 길어야 15분이었다. 따라서 이때 교신을 하지 못하면 다음 교신을 보장할 수 없었다. 그런 만큼 지상국 분위기는 초긴장 상태였다.

교신을 시도한 지 6분 후. 드디어 위성과 교신을 했다.

“태양전지는 42.32V로 전기를 공급하고 있으며, 축전기 전원도 14V로 정상임.”

그 순간 천 원장과 연구원 일동은 손을 잡고 외쳤다.

“우리가 해냈다! 과학기술 만세!”

위성이 보낸 190여개의 데이터를 분석한 결과 위성은 아무 이상 없는 상태라는 것을 확인했다. 역사적인 순간이었다.

첫 교신자인 당시 KAIST 연구원이던 최경일 KT SAT 최고기술책임자(CTO)의 소감.

“직접 제작한 위성이 1300㎞ 상공에서 제대로 작동하는 것을 확인하니 그 기쁨은 말로 표현할 수 없었습니다.”

1992년 8월 11일은 한국이 우주시대를 연 첫날이었다. 기쁘고 자랑스러운 날이었다.

이현덕 대기자 hdlee@et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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