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우리는 많은 관계 속에서 살아간다. 갈등과 다툼이 없는 관계는 없다. 가까운 관계일수록 상처는 더 깊다. 부부 사이의 말 한마디, 부모와 자식 사이의 오해, 친구 간의 서운함이 그렇다. 시간이 흐르면 잊힐 법도 한데, 마음속에 작은 가시처럼 남아 있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는 세 가지 선택이 가능하다. 불편한 관계를 풀고 갈 것인가, 묻고 갈 것인가. 아니면 끊고 갈 것인가.
가장 안 좋은 선택은 묻고 가는 것이다. 관계하는 모든 이를 불행하게 하는 최악의 선택이다. 차선은 끊고 가는 것이다. 이 역시 어느 일방에겐 좋은 선택일 수 있지만, 단절을 당하는 상대에겐 씻을 수 없는 상흔을 남긴다. 결국 최선은 풀고 가는 것이다. 갈등을 없던 일로 치부하거나 갈등 이전의 상태로 돌리는 것이 아니라 한 단계 더 깊고 성숙한 관계로 발전시키는 것이다. 이를 위해선 반드시 필요한 게 있다. 바로 용기다.
무엇보다, 자신의 불완전함을 인정하는 용기가 필요하다. 상대를 응징하는 호기(豪氣)가 아니라 자신의 약점과 부족함을 드러내는 용기 말이다. 스스로 부족함을 드러내는 말은 꽁꽁 닫혀 있는 상대의 마음 문을 연다. 또한 말한 사람의 마음도 평화롭게 한다. 상대에게 지지 않으려는 부담감에서 벗어나게 한다. 그런 편안함이 관계를 편안하게 한다.
하지만 부족함을 드러내기가 쉽지 않다. 왜 그런가. 무엇이 부족한지 잘 모르기 때문이다. 아니 알고 싶지 않다. 자신의 부족함과 마주하는 용기가 부족해서다. 그래서 외면한다. 다른 사람이 그걸 지적하거나 건드리면 도리어 화를 낸다. 그런 사람일수록 ‘내가 그 정도는 아니다’라고 스스로 위안 삼거나 잘못된 관계의 책임을 상대에게 돌린다. 부족한 걸 알고 있어도 사람에 대한 믿음이 부족하면 말하지 못한다. 그로 인해 누군가에게 뒤통수를 맞거나 동정의 대상이 될 수 있다는 노파심 때문이다.
둘째, 관계를 풀기 위해서는 갈등을 감수하는 용기도 필요하다. 진정한 관계는 갈등을 피해 가는 것이 아니라 갈등을 통과해가는 것이다. 완벽한 관계란 상처가 없는 관계가 아니라 상처를 딛고 일어선 관계다. 좋은 게 좋은 것이라며 싫은 소리 않고 갈등을 외면하면 관계가 나아지지 않는다. 물속에 불순물이 있으면 휘저어서 눈에 띄게 하고 정화하는 과정이 필요한데, 휘젓는 것 자체를 기피하면 관계는 더 곪아간다. 덮어놓는다고 고름이 살이 되는 게 아니다. 갈등을 수면 위로 드러내고 이에 대해 갑론을박하면 비 온 뒤에 땅이 굳어지듯, 이전보다 더 돈독해지고 신뢰가 굳건해질 수 있다.
셋째, 약한 사람 편에 서는 용기도 있어야 한다. 관계를 맺다 보면 나보다 강한 사람이 있고 약한 사람이 있다. 강한 사람과는 보다 좋은 관계를 맺고 싶고, 약한 사람과는 가까운 관계가 그리 달갑지 않다. 얻을 게 별로 없기 때문이다. 바로 이게 문제다. 세상에는 나보다 강한 사람보다는 약한 사람이 많다. 관계라는 관점에서 보면 그렇다. 어차피 나보다 강한 사람과는 관계 맺을 확률이 낮다. 내가 원한다고 되는 것도 아니다. 강한 사람은 그 사람대로 약자와 관계 맺는 걸 달가워하지 않을 것이므로 그렇다. 그렇다면 우리는 자신보다 약한 사람과 관계를 넓혀나갈 수밖에 없다. 그것이 또한 정의로운 일이기도 하다. 억강부약(抑強扶弱), 즉 강한 사람을 억누르고 약한 자를 도와주는 정신에 부합하기 때문이다.
넷째, 미움받을 용기다. 여럿이 있으면 그중 한두 명은 왕따 당하는 사람이 있다. 그런 사람은 늘 뒷담화의 대상이 된다. 그럴 때 그 사람을 변호할 용기가 있는가. 남들이 모두 욕할 때 ‘그 사람 그렇지 않다’라고 말할 용기가 있는가. 그런 용기를 갖기 위해서는 모든 사람에게 사랑받고 싶은 욕심, 모든 관계에서 성공하고 싶은 욕구를 절제해야 한다. 때로는 욕먹을 각오도 해야 한다. 이는 비단 관계에만 적용되는 얘기는 아니다.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일에 다수가 반대했을 때, 그들에게 미움받는 위험을 감수하면서 소신껏 추진할 수 있는가. 모두가 쉬쉬하는 거북한 문제에 용기 있게 발언할 수 있는가. 이런 용기는 당장 많은 사람을 잃을 수 있다. 그들을 적으로 만들 수도 있다. 하지만 종국에는 더 단단하고 두터운 관계를 만들어줄 것이다.
끝으로, 가장 큰 용기는 용서다. 용서가 관계를 완성한다. 용서는 약함의 표시가 아니라 강함의 증거다. 용서할 수 있는 사람만이 진정으로 사랑할 수 있고, 용서받은 경험이 있는 사람만이 타인을 깊이 이해할 수 있다.
흔히 용서는 ‘상대의 잘못을 덮어주거나 없었던 일로 만드는 것’이라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조금 더 깊이 들여다보면, 그것은 나를 위한 선택이다. 남에게 시혜를 베푸는 일이 아니라 자신을 구원하는 일인 것이다.
미국의 심리학자 에버렛 워딩턴(Everett L. Worthington Jr)은 용서를 ‘상대의 잘못을 계속 붙잡고 있던 내 마음을 내려놓는 행위’라고 정의했다. 즉 용서는 상대를 위한 것이 아니라 나를 위한 것이라는 얘기다. 에버렛은 1955년 어머니가 강도에게 목숨을 잃은 후, 그 살인자를 용서하는 문제를 두고 오랜 시간 씨름했다. 결국 상처를 오래 붙잡고 있을수록 고통을 키우는 건 상대가 아니라 바로 나 자신이란 사실을 깨달았다.
미움과 원망을 품고 있는 한 나는 자유롭지 못하다. 용서를 결심하는 순간, 억눌린 감정에서 벗어날 수 있다. 용서란 결국 미움과 원망과 서운한 감정의 굴레에서 나 자신을 해방하는 일이다. 상처를 붙잡고 있으면 내 삶은 늘 과거에 머물지만, 용서하는 순간 현재와 미래로 나아갈 수 있다. 인간관계의 완성은 화려한 만남이나 잦은 교류가 아니다. 결국은 상처를 넘어서는 용서의 힘에 달려 있다.
용서를 거친 관계는 이전보다 훨씬 견고해진다. 서로의 약점을 알되 그것을 무기로 사용하지 않는 성숙함을 갖게 된다. 완벽하지 않은 모습도 받아들일 수 있는 여유가 생긴다. 이런 관계에서는 더 이상 가면을 쓸 필요가 없다. 진정한 자신을 드러내도 안전하다는 확신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용서가 쉬운 일은 아니다. 진정한 용서는 지난한 과정을 필요로 한다. 먼저 상처를 인정해야 한다. ‘괜찮다’라는 말로 덮는다고 미움과 갈등이 사라지지 않는다. 그다음은 분노와 서운함을 표현하는 단계다. 감정을 꺼내야만 이해가 시작된다. 마지막으로는 내려놓음이다. 여전히 아프지만, 그 감정에 더 이상 끌려가지 않겠다는 결단이다. 사과와 반성도 필요하다. 잘못한 사람이 진심으로 반성하고 사과해야 한다. 그런 토대 위에서 용서하고 화해해야 한다. 그리하여 용서가 용서를 낳는 선순환이 이뤄져야 한다. 그런 점에서 용서는 차가운 이성의 결단이 아니다. 뜨거운 심장이 내는 용기다.
우리는 용서하는 용기를 김대중 전 대통령에게서 봤다. 김 전 대통령은 자신을 죽이려고 했던 박정희와 전두환을 용서했다. 그리고 이렇게 말했다.
“박정희 시대에 맺었던 원한을 딸이 와서 풀었다. 내 속의 응어리가 풀렸다. 내가 구원을 받은 것 같다. 용서는 따지고 보면 남을 위한 것이 아니라 자기를 위한 것이다. 우리는 용서함으로써 인격적으로 의로워지고 정신적으로 건강해진다. 용서하지 않고 남을 저주한다는 것은 자기를 괴롭히고 편협하게 만들 뿐이다.”
오늘도 누군가와의 관계에서 상처받고 고민하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그럴 때 이것만은 기억하자. 관계를 정리하는 건 쉽지만, 관계를 완성하는 건 용기가 필요하다는 것을. 그리고 그 용기의 이름이 용서라는 것을. 거기에 우리의 희망이 있다는 사실을.
<강원국 작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