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생들 리포트에 등장한 미묘한 단어...알고보니 AI의 취향[BOOK]

2025-01-17

쓰기의 미래

나오미 배런 지음

배동근 옮김

북트리거

나는 AI와 공부한다

살만 칸 지음

박세연 옮김

알에이치코리아

2023년, 미국 캘리포니아 버클리 대학의 러시아 문학 교수는 학생들의 리포트를 읽다가 이상한 점을 발견했다. 여러 리포트에 등장한 ‘delve’라는 단어였다. '탐구하다, 규명하다'라는 뜻의 이 동사는 사어는 아니었다. 그러나 수십 년 동안 학생들이 제출한 글에서 마주친 적은 없었다.

수수께끼는 곧 풀렸다. 챗GPT가 좋아하는 단어였던 것이다. (그 밖의 선호 단어로는 ‘복잡성’, ‘다면적인’ 등이 있다.) 일단 경보가 켜지자 교수는 AI가 써준 리포트를 골라내는 데 아무 어려움이 없었다. 읽으면 바로 알았다. 그 리포트들은 모든 것을 ‘복잡하고’ ‘다면적이고’ ‘미묘한 뉘앙스가 있’다고 얼버무릴 뿐, 개인적 관점이란 게 없었다.

2022년 하반기에 챗GPT가 등장한 지 만 2년이 조금 더 지났다. 지금 그때의 경악과 흥분을 찾아보기 어려운 건 사실이다. AI 기술은 그사이에도 진화했지만, 우리의 기대치는 그보다 큰 폭으로 하락했다. 우리는 AI가 예컨대 창립 10주년 기념사 같은, 아무도 신경 안 쓰는 글은 꽤 잘 쓴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러나 자료를 주고 1/4분기 판매 보고서를 작성하라고 하면 낭패를 본다는 것도 안다. 어딘가에서 기막힌 오류를 범할 것이고 그 오류는 열 번 다시 해도 안 고쳐진다는 것까지. AI는 똑똑한 대학원생과 최악의 신입사원의 얼굴을 다 가지고 있다.

나오미 배런(1946~)은 뉴욕 출신의 언어학자이자 아메리칸 대학교 석좌 교수이다. 주된 관심은 기술 발전과 컴퓨터. 그가 쓴 이 책은 AI가 인간의 글쓰기를 대체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에 답한다. 원제는 ‘Who Wrote This?’(누가 이것을 썼을까?). ‘이것’이 ‘이 책’인가? 라고 생각하면 읽다가 조금 으스스해진다.

왜 글을 쓰는가? “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기 위해 쓴다.”(조앤 디디온) 비슷한 말을 한 사람은 많다. ‘생각의 존재는 글쓰기로만 확인된다.’ 또는, ‘우리는 글을 쓸 때만 생각한다.’ 이것이 뇌과학으로 입증되지 않더라도 상관없다. 작가들은 이를 경험으로 알고 있다. 생각은 글과 따로 있는 게 아니고, 글쓰기에 포함된 어떤 과정이다.

이런 글쓰기를 AI가 대신해 준다면 인간은 꽤 곤란해질 것이다. 우리는 면제된 일에서 무능해지기 마련이므로, 곧 사고력을 잃을 것이다. 나중에 AI가 고도로 발전한다면 말이다. 그러나 그런 상황을 미리 가정해서 밀고 나가려는 책이 아니기 때문에 책의 주제는 약간 모호해진다.

글쓰기의 입지는 전부터 좋지 않았다. 저자는 글쓰기가 이미 20세기 초 교육 기관에서 주변화된 존재였음을 담담히 보여준다. 만일 글쓰기의 최후의 숨통을 끊는 것이 AI가 된다 해도 모든 책임을 그에 뒤집어씌우는 건 파렴치한 일이 될 것이다.

책 끝에서 저자는 AI에게 숙제를 시키느니 차라리 빵점을 받으라고 권한다. “학생 때는 자신의 실상과 대면하는 게 훨씬 낫기 때문”이다. 과연 인문학자다운 발상이며, 하고 싶은 말도 이거였을 것이다.

『나는 AI와 공부한다』는 미국의 교육 사업가 살만 칸(1976~)이 자신의 AI 교육 플랫폼 ‘칸미고’의 취지와 이용 방법을 적은 책이다. 일종의 홍보 책자이므로 거부감이 생기는 건 불가피하다. 다만 선전과 무관하게 어떤 깨달음이 온다. AI는 1:1 맞춤 교육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것도 학습자를 한 발 한 발 올바른 해결로 유도하는 수준 높은 교사로서 말이다. 이것은 기존의 공교육이(심지어 대부분의 사교육도) 제공할 수 없었던 것이다.

AI가 보고서를 대신 써줄 수 있다는 건 현실이다. 사회는, 학교나 회사는 이를 어디까지 용인할 것인지 결정할 수 있다. 금지할 수도, 허용할 수도 있고, 수준이 어떻든 인건비 절감의 기회로 보고 환영할 수도 있다. 그러나 AI를 1:1 학습 도구로 보급한다는 건 다르다. 이를 막을 수 있을까? 없다. 높은 확률로 AI 학습 도구는 꼭 필요한 학생보다는 그게 없어도 성공적이었을 학생에게 날개를 달아 주는 결과를 낳을 것이다. 학력 격차는 더 심화될 것이다. 모든 계층의 아이들을 한 교실에 넣어 국민으로 만든다는 공교육의 이상은 이런 식으로 거의 이름만 남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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