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의 윤봉길 의사 추모관 [김태훈의 의미 또는 재미]

2025-02-01

지금으로부터 80년 전인 1945년 9월2일 오전 일본 도쿄 앞바다. 정박해 있는 미 해군 전함 미주리 함상에서 미국, 영국, 중국 등 연합국에 대한 일본의 항복 문서 조인식이 열렸다. 패전국 일본을 대표해 시게미쓰 마모루(重光葵) 외무상이 참석했다.

그는 오른쪽 다리를 절단하고 의족과 지팡이에 의존하는 장애인이었다. 측근의 도움을 받아 힘겹게 전함 위로 올라간 다음 절뚝거리며 문서가 놓인 책상까지 이동했다. 이어 선 채로 고개를 푹 숙이고 항복 문서에 서명했다. 연합군 최고사령관인 더글러스 맥아더 미군 원수는 차가운 표정으로 시게미쓰의 일거수일투족을 주시했다.

독일, 중국 등에서 외교관으로 오래 일한 시게미쓰는 1932년 4월29일 중국 상하이 훙커우 공원에 있었다. 일본 국왕 히로히토(裕仁)의 생일을 축하하는 기념식에 참석하기 위해서였다. 이 행사는 1932년 초 상하이 사변을 일으킨 일본군이 중국군과의 전투에서 승리해 상하이를 점령한 것을 자축하는 의미도 있었다. 그런데 기념식 도중 느닷없이 폭발이 일어나 현지 주둔 일본군 사령관을 비롯한 장성 여럿이 그 자리에서 즉사했다. 시게미쓰는 목숨을 건졌으나 크게 다친 오른쪽 다리를 절단해야 했다. 폭탄을 던진 이는 바로 매헌 윤봉길(1908∼1932) 의사였다.

“중국의 100만 대군도 하지 못한 일을 한 청년이 해내다니….” 윤 의사의 의거를 전해 들은 장제스(蔣介石) 당시 중국 국민당 주석이 내놓은 반응이다. 이후 중국은 대한민국 임시정부 활동을 적극 지원했다.

1943년 11월 장제스가 이집트 카이로에서 연합국 양대 거두인 프랭클린 루스벨트 미국 대통령, 윈스턴 처칠 영국 총리와 만났을 때 그는 제2차 세계대전 종전 후 한국이 독립국이 돼야 할 필요성을 강력히 제기했다. 덕분에 3국 정상이 발표한 카이로 선언에는 ‘한국인의 노예 상태에 주목하고, 적절한 시기에 한국의 자유와 독립을 회복한다’라는 문구가 들어갈 수 있었다.

이처럼 윤 의사의 행동은 전 세계에 한국의 독립 의지를 알리고 한때 침체되었던 국내외 항일 독립운동에 새로운 전기를 마련했다. 하지만 거사 직후 붙잡힌 윤 의사는 일본 군법회의에서 사형을 언도받고 1932년 12월19일 가나자와(金澤) 육군 공병 작업장에서 24세 나이로 순국했으니 참으로 통탄할 일이 아닐 수 없다.

오는 4월29일이면 윤 의사의 훙커우 공원 의거 93주년이 되는 가운데 이에 맞춰 재일동포와 일본 시민단체가 가나자와에 추모관을 개설할 방침이라고 한다. 마침 올해는 광복 80주년이다. 일본의 윤 의사 추모관이 한국은 물론 일본 젊은이들에게도 평화의 중요성을 일깨우는 교육의 장이 되길 소망한다.

김태훈 논설위원 af103@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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