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니와 아노라 vs 아라비카와 렘피라 [박영순의 커피 언어]

2025-03-22

이름은 존재하는 것에 따라 붙는 게 아니라 존재의 근원이다. 굳이 19세기 소쉬르의 이론이나 김춘수의 ‘꽃’을 들이대지 않더라도, 이름을 함부로 짓거나 부르는 것을 꺼리는 것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오스카 5개 부문을 수상한 ‘아노라’에도 이런 설정이 있다.

주인공은 우즈베키스탄에 뿌리를 둔 이름인 아노라로 불리는 것을 싫어한다. 러시아 사람으로 보이고 싶기 때문이다. 그래서 자신을 애니라고 소개한다. 애니는 러시아에서 여성에게 많이 지어주는 아나스타샤의 애칭으로서 ‘부활’을 의미한다. 스트리퍼로 비루한 삶을 살아가는 아노라에게 다시 태어나고자 하는 간절함이 깃든 이름이겠다.

아노라를 진심으로 걱정해주는 유일한 남성으로 보이는 이고르는 러시아인이지만, 이름은 노르웨이에서 기원했다. ‘보호자’라는 뜻을 지니고 있다. 재벌 2세로서 천방지축이며 골칫거리인 이반은 성경에 등장하는 요한의 라틴어 표기인 이오한네스가 러시아식으로 변형된 것이다. ‘하느님의 은혜’라는 뜻이니, 그가 금수저임을 알리는 일종의 복선이다.

커피 품종의 명칭도 존재의 의미를 가늠하는 힌트가 된다. 스페셜티 커피의 유행과 함께 산지는 물론 품종까지 가려가며 커피를 마시는 문화가 퍼지고 있다. 명칭의 기원과 의미를 알면 정서가 공감되면서 커피 마시는 시간이 더욱 뜻깊어지게 마련이다.

모든 커피 품종명에는 사연이 있다. 흔치 않지만 빠르게 대중화하고 있는 커피부터 살펴보면, 온두라스의 렘피라가 있다. 렘피라는 1537년 스페인의 식민 통치에 저항하다 처형당한 렝카족의 전사이다. 온두라스는 화폐 단위를 페소에서 렘피라로 변경하고, 지폐에 그의 초상을 담았다. 온두라스커피연구소가 티모르 하이브리드와 카투라를 교배해 만든 신품종에 렘피라라는 이름을 붙였다. 생산성이 높으면서도 향미가 좋아 온두라스를 살릴 ‘희망의 커피’로 떠오르고 있다.

병충해에 강하면서도 맛을 잃지 않는 마르세예사는 이 품종을 개발한 프랑스의 긍지를 담은 명칭이다. 프랑스농업연구소가 사치모르 계열을 품종 개량해 멕시코와 코스타리카에 제공했다. 프랑스 대혁명에서 마르세유 의용군들이 행진하며 부른 노래 ‘라 마르세예즈’가 프랑스의 국가가 됐는데, 혁명의 정신을 품종의 명칭에 담아 전 세계 커피 애호가들에게 전하고 있다.

아나카페14를 생소해하는 커피 애호가가 많지만, 과테말라에서는 카투라, 카투아이에 이어 많이 재배하는 품종이다. 치키물라 지역에서 대를 이어 커피를 재배하던 프란시스코 만차메라는 농부가 카티모르와 파카마라를 함께 키우던 밭에서 발견했다. 자연교배를 통해 모습을 드러냄에 따라 과테말라 커피 재배자들은 ‘신의 선물’이라고 부른다. 가뭄에 잘 견뎌 지구온난화로 걱정이 많은 농부들에게 특히 시선을 끌고 있으며, 맛이 하와이 코나나 자메이카 블루마운틴과 유사하다고 주장하는 전문가가 적지 않다.

우리에게는 마치 의성어로 들리는 우시우시는 게샤처럼 커피나무가 발견된 지역명에서 따왔다. 에티오피아 남서부지역의 카파 마을 인근으로 게샤 종이 발견된 숲에서 그리 멀지 않다. 게샤가 서양인의 잘못된 표기로 ‘게이샤’가 된 사연과 비슷하게, 우시우시는 에티오피아인에게는 한 단어로서 멈춤이 없는 한 발음인데, 표기가 ‘우시 우시’가 됐다. 우시우시는 오로미아 족의 언어로 ‘좋다’는 의미다. 그 뜻과 같이 강렬한 꽃향기와 농익은 과일맛, 꿀처럼 진한 단맛으로 게샤와 쌍벽을 이루는 품질을 지녔다는 평가를 받는다.

값싼 커피를 여기저기서 끌어모아 파느라 품종을 구체적으로 밝히지 못한 채 아라비카라거나 블렌딩이라고 판매하는 커피가 적지 않다. 출처와 품질에 대한 자신감이 없다는 고백과 다름이 없다. ‘애니’라는 흔한 이름 뒤에 숨지 말고 밝게 빛나는 ‘아노라’라고 말하기를 바란 이고르처럼, 아라비카라는 모호함에 머물지 말고 당당하게 구체적 이름을 밝히는 커피 문화가 조성됐으면 좋겠다.

박영순 커피인문학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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