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하지대본이란 말은 익숙하지 않다. 반면 농자천하지대본(農者天下之大本)이라는 말을 모르는 한국 사람은 드물다. 어려서부터 여러번 들어온 말이고 역사적으로도 우리 삶과 관련이 크기 때문이다. 이 말의 근원은 여러 문헌에서 확인할 수 있다. 멀리는 기원전 문헌인 ‘사기(史記)’에서부터 가깝게는 조선 건국 설계자 정도전의 ‘조선경국전(朝鮮經國典)’에 등장한다. 농사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이 말은 표어에 가까운 위상을 가지며 한 시대를 지배했다.
농자천하지대본은 농업이 중심이었던 동아시아 문화권의 특징을 드러낸다. 역사적 배경으로 볼 때 국가를 구성하는 대부분의 사람, 즉 백성의 먹고사는 문제가 농업의 성패에 달려 있었기 때문이다. 별다른 산업이 없던 과거에는 농업이 백성의 생계를 해결한다는 점에서 국가가 관리해야 하는 가장 중요한 산업이었다.
그러나 산업혁명 이후 과학기술 발달로 과거와 달리 백성의 삶을 윤택하게 만드는 다양한 산업이 등장했다. 이제는 농업과 더불어 다양한 산업이 백성, 그러니까 국민의 경제적 삶을 윤택하게 하는 데 이바지한다. 그렇기에 우리 사회가 이 표현을 계속 사용하기는 하지만 의미는 과거보다 더 넓어진 듯하다. 민주주의 사회 체계에 걸맞게 과거 농자의 지위는 이제 국민이 대체했다고 볼 수 있다. 대한민국 헌법에서도 모든 권력이 국민에게서 나온다는 점을 명확히 하고 있다. 인류가 어떤 형태의 국가를 이루고 살든 결국 백성, 나아가 국민이 사회의 주인이라는 점에는 변함이 없다.
새로운 한해가 시작했지만 한국은 여전히 혼란의 한복판에 있다. 올해는 어쩌면 국내외 상황 모두 우리에게 녹록지 않아 보인다. 트럼프 재집권 이후 세계질서의 변화, 아직도 진행 중인 국제 전쟁의 불확실한 미래, 여기에 한국 내 혼란스러운 정치 상황까지 쉬운 것이 없다.
이 모든 혼란이 과연 국가의 주인인 국민의 의지에 따른 것인지 물어야 한다. 대외적 상황이야 우리 국민의 통제권을 벗어난 일이기에 적절히 대응하면 될 일이다. 그러나 현재 국내 상황은 국민이 천하지대본임을 잊었기에 발생한 일이 아닌가 싶다. 이런 상황은 한국의 대외적 위상과 경쟁력에도 적지 않은 어려움을 만들어내고 있다. 지금 정부와 정치권 어느 곳도 본연의 역할에 맞는 국민을 향한 충실함을 보여주고 있는지 의문이다. 지금의 혼란은 또 다른 혼란의 이유가 될 것이다. 이런 악순환은 결국 국가의 주인인 국민에게 불편함과 경제적 손해로 다가올 가능성이 크다. 국가경쟁력 측면으로 보자면 더욱 우울한 미래를 예측해야 할지도 모른다.
지금의 상황은 국가 권력의 본질이 무엇인지를 망각한 권력으로부터 출발한 결과다. 국가의 본질은 천하지대본, 엄연히 국민이다. 국가와 정치, 그리고 경제는 모두 국민의 윤택한 삶을 지향점으로 할 때만 언행의 정당성을 확보할 수 있다. 해방 이후 국민은 역사적 혼란기에도 평범한 삶의 주인이 세상의 중심이라는 점을 여러차례 확인해줬다. 이번이라고 별다를 게 없는 결론을 예상한다. 다만 혼란스러운 국제 정세와 맞물린 지금, 평범한 개인의 삶에 미칠 악영향을 최소화하는 방향으로 조속히 마무리돼야 할 것이다. 인류가 국가를 형성한 이래로 그 사회의 주된 사람들이 늘 세상의 근본이었고 권력의 출발점이었다. 모든 사회적 행위는 다수의 삶을 윤택하게 하는 방향이어야 함 역시 변함없다.
조연성 덕성여대 국제통상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