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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과의사가 되기 전에 연구원 생활을 잠시 하였다. 처음에 발령받은 부서는 새로운 제품이나 원료를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고, 다른 팀에서 연구한 결과물을 평가하는 일을 주로 맡았다. 제법 큰 회사였기에 평가가 필요한 신제품이나 원료도입을 위해 의뢰되는 시료는 몹시 많았다. 그럼에도 팀장님은 그 외에도 고유 연구 프로젝트를 추가해야 한다고 고집하셨다.
업무 특성상 일과 시간엔 대인업무를 하고, 데이터 정리와 보고서 작성 그리고 다음실험 계획을 위해서는 일과 후에 남아서 일을 해야 했다. 거기에 추가 프로젝트를 하려면 거의 매일 야근을 해야 하는 셈이어서 거부감이 들었다. 진로를 전향한 데에는 야근이 싫어서도 있다. 진료시간 끝나고 환자가 없는 때 남아서 일할 일은 없겠지라는 계산도 조금 들어있었는데, 개원의가 되고 보니 오산이었다. 게다가 퇴근 후에 개인적인 일을 미루고 자발적으로 회무를 하러 가는 요즘을 보면 아이러니하기도 하다.
사회 경험이 길어지며 생각이 달라진 부분이 또 있다. 우리가 도시에서만 살아보면 수도나 전기, 가스, 대중교통 등은 너무나 당연한 것이어서 인프라의 편리함에 대해 생각할 기회조차 없다. 어릴 적 우리 할아버지 댁은 수도가 공급되지 않아 앞마당에 있는 수동펌프로 물을 끌어 썼기에, 물을 얻기 위한 수고로움을 온몸으로 느낄 수 있었다. 더 깊은 시골에 있는 부모님 댁은 이제는 마을 공동수도에서 물을 대어와서 수도꼭지만 틀면 물이 나오는 것이 당연하게 되었다. 그러나 도시가스망은 연결되지 않으므로 어머니는 가스가 떨어지지 않는지 늘 확인하고 신경을 쓰신다. 가사일도 딱 그렇다. 일을 잔뜩 해도 티가 안 나는데, 조금만 소홀해져도 확 표가 난다. 회사에서도 팀이 없어지기 전에는 다들 긴요함을 모를 것이나, 그렇다고 존재감을 알리기 위한 파업을 할 수는 없으므로 팀장님은 부가적 연구성과로 팀의 역할과 팀원의 역량을 어필하고 싶어했던 것이다.
협회 업무도 비슷하다. 간혹 회원 중에 협회비의 집행과 관련하여, 개막식이나 전야제 등 행사가 회비를 낭비하는 것 같아 싫다고 우려하시는 분들이 있는데, 우리가 확연히 인지하는 몇 가지 행사는 협회가 하고 있는 업무 중에선 빙산의 일각 같이 일부에 불과하다. 더군다나 전야제가 열리는 학술행사는 협회비와 무관하게 개별 학술대회의 별도 수입과 예산으로 집행된다. 독자들이 읽고 계시는 치의신보 역시 협회비가 아니라 독자비용으로 만들어져 회원들에게 제공되고 있음을 노파심에 말씀드리니 혹여 오해하셨다면 마음을 푸셔도 된다.
우리 협회는 회원을 위해 조금 더 밑바닥에서부터 자질구레한 일들을 담당한다. 매년 수가를 정하기 위해 마라톤 회의를 하는 일에서부터 학술대회의 학점인정과 치과병의원 진료운영에 이르기까지 치과에 관련된 모든 행정 시행령에 대응하는 업무는 협회가 미리 회원들을 위한 길을 닦아놓고 꾸준히 보수하고 있는 것이다. 협회 내에 잡음과 소송이 이어지니 이에 염증을 내는 회원들이 늘어나고 있는 것도 심적으로는 이해한다. 게다가 요즘 우리나라 경기도 무척 좋지 못하니 치과라고 분위기가 윤택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회비 납부율이 점차 저조해지는 데에는 그런 배경도 있으리라 생각한다. 다만 각자의 사정은 있더라도, 다른 회원의 십시일반으로 굴러가는 협회행정에 본인이 무임승차 중이라는 자각은 있으셨으면 한다.
사회 분위기가 전반적으로 좀 더 여유로웠을 때에는, 봉직의 신분을 벗어나 터전을 잡아 개원하게 되면 비로소 분회에서 입회하고, 그 전까지 협회비를 내지 못하는 것에 대해서는 자리잡은 선배의 배려로 이해하는 관례가 있었으리라 생각한다. 이제는 그 배려를 누리는 사람이 점차 많아져 도리어 협회비를 꼬박 내는 회원이 억울한 생각이 든다면, 이건 뭔가 잘못된 것이 아닐까.
올해 몫의 회비가 없어서 못 내실 회원은 없다고 본다. 미납기간이 길수록 고민이 많아질 것이 충분히 짐작이 간다. 그러나 꼬박 회비를 내오신 회원과의 형평성을 고려하면 생각이 복잡해진다. 나는 사안이 복잡해 보일수록 간단한 방법이 최선이라고 본다. 무엇보다 회비를 낸 회원의 권리와 혜택을 확실하게 챙기는 것이 맞다. 그래야 회비를 내지 못하여 권리를 누리지 못한 이에 대해 안타까움도 느낄 수 있고, 절반 가까운 미납회원을 다시 회 안으로 인도하기 위해 짜낸 방안에 대해 너그러운 긍정을 얻을 수 있지 않겠나.
올해 갑자기 추진된 학술대회 등록비 차등정책으로 인해 여론이 뜨겁다. 회비 납부가 회원의 의무임은 맞다. 의무를 다한 회원을 가장 우선에 두는 방향도 맞다고 생각한다. 다만, 우리 회의 궁극적인 목표는 모든 회원을 아우르기 위함이 아닌가. 정책이 용두사미로 끝나 공연히 감정만 상하고 어수선한 뒷맛을 남기지 않도록, 이 정책의 지속가능성에 대해 신중히 고려해주시기를 바란다. 과년회비를 정리하는 방법과 완납회원에 대한 우대책에 대해서도 구체적인 방안을 먼저 모색해주시는 것이 맞다고 본다. 또한 사족이지만 회비납부와 맞물려 통치잉여금에 대한 이야기도 끊임없이 들린다. 현 협회장님을 비롯하여 지난 선거의 모든 입후보자분께서 통치 잉여금의 반환에 대해 공약을 내주셨던 것으로 기억한다. 공약이 조속히 실현될 수 있도록 대의원총회에서 잉여금반환 집행에 대해 소중한 의결을 내주시기를 부탁드린다.
공산주의 사회가 아닌 바에야 만장일치란 극히 드물다. 어떤 사안이든 서로 다른 의견을 가지고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다만 회무를 경험하며 참 어렵게 느껴지는 부분은, 어떤 결정을 내리더라도 반대급부는 있을 수 있는데 이것이 쉽게 정쟁화되어 막상 해야 할 일이 밀리는 점이다. 우리 치과계를 위해 일하는 분들이 항상 회원의 일상을 지키는 것을 최우선으로 생각해주시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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