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태취재| 맨즈뷰티 열풍, 거울왕자가 된 2030 남성들
다양성 트렌드로 접어든 남성 화장품…자연스러움 무기로 사랑 받아
심화하는 2030 남성들의 ‘꾸밈 양극화’…그에 맞춘 시장 전략이 관건
눈내리는 지난 1월 초, 홍대입구역 인근 CJ올리브영 매장을 방문했다. 가게 문을 열자 오순도순 화장품을 구경하는 한 커플이 눈에 들어왔다. 남성이 여자친구로 보이는 여성에게 제품을 설명해 주고 있었다. 커플뿐만 아니라 홀로 물건을 사러 온 남성 고객들도 꽤 있었다. 상당히 추운 날씨였음에도 문전성시를 이루는 매장을 보며, 새삼 맨즈뷰티 열풍이 와 닿았다.
“요즘 고객 4명 중 한 명은 남성이에요.” 올리브영 메이트(올리브영 아르바이트생의 명칭)는 이렇게 말했다. 금요일 오후 시간대에 어림잡아도 남성 고객이 열댓 명은 족히 돼 보였지만, 외국인 손님이 많은 홍대 상권의 특성상 타 매장에 비해 남성 고객이 적은 편이라고 했다.
“이 제품이 가장 인기예요.” 동작구 소재 매장에서 만난 올리브영 메이트는 가장 많이 팔리는 남성용 상품을 묻는 말에 이같이 답했다. 향수나 스킨케어 제품이 아닌 파운데이션이라는 전혀 예상하지 못한 답변이 돌아왔다.
사실 국내 맨즈뷰티 시장이 뷰티업계 블루칩으로 자리매김한 것은 어제오늘 일이 아니다. 글로벌 시장조사기관 유로모니터는 2022년 기준 우리나라의 연간 남성 스킨케어 소비액이 1인당 9.6달러였다고 발표했다. 2위를 기록한 영국(4.4달러)보다 두 배 이상 많은 수치였다. 국내 맨즈 뷰티 시장 규모가 4년 연속 성장세를 기록 중이고, 특히 2024년에는 전년 대비 4%가량 상승한 약 1조 2000억원에 달했다. 지난해 약 4조원의 매출을 올리며 처음으로 뷰티업계 1위로 등극한 CJ올리브영은 같은 해 1~7월 피부 톤 보정 로션, 컬러 립밤 등 남성 메이크업 상품군을 전년 대비 절반 이상 출시 한 바 있다.
“자신을 가꾸는 일은 투자”
2010년대 중반만 하더라도 화장하는 남자는 드물었다. 선크림을 바르는 남자도 그리 흔하지 않았다. 오늘날 선크림은 맨즈뷰티 맨 하단에 위치한 기본 아이템이다.
자신을 ‘평균적인 대한민국 남성’이라고 소개한 신건우(20대·남) 씨는 외모 관리에 특별 한 신경을 기울이지 않는다며 웃었다. 신씨는 “외출할 때 선크림은 항상 바른다. 성분도 꼼꼼히 신경 쓰지만, 그 외에는 더 바르지 않는 편”이라고 소개했다. 현재 취업 준비생인 그는 “주위 친구들과 비교하면 보통 수준”이라고 덧붙였다.
김주덕 성신여대 뷰티학과 교수는 “소위 MZ세대 남성들이 맨즈뷰티를 자기 계발의 일환으로 바라본다”고 분석했다. “2030 남성들 사이에서 ‘외모도 경쟁력’이라는 인식이 확대되면서 자신을 가꾸는 일을 투자로 생각하게 됐다”고 설명한다.
평소 친구들 사이에서 그루밍족(외모를 경쟁력으로 생각하며 자신의 패션과 미용에 아낌없이 투자하는 남성들을 지칭하는 신조어)으로 통하는 송수범(20대·남) 씨가 대표적이다. 송씨는 “화장한다고 핀잔하던 친구들도 요즘은 좋은 제품을 추천해달라고 한다”며 맨즈뷰티의 달라진 위상을 체감한다고 말했다. 이어 “이제는 (자기 관리를) 안 하면 사회적으로 뒤처지는 시대인 것 같다”며 맨즈뷰티가 전혀 놀랍지 않은 자연스러운 현상이라고 강조했다.
취재 과정에서 서울 소재 화장품 매장 일곱 군데를 방문했다. 그곳에서 20대 여성들 역시 맨즈뷰티 열풍을 견인하는 듯한 모습을 발견했다. 그들은 동행한 남성이 사용할 제품을 골라주거나 특정 제품을 추천하고 있었다.
마포구 모 화장품 가게에서 만난 대학생 오하은(20대·여) 씨는 “남자친구에게 선물할 매너용품을 사러 왔다”며 “주위 여성 친구들을 보면, 최근에는 자신이 꾸미는 데 관심이 많을수록 남자친구도 외모를 더 가꾸길 기대한다”고 했다. 그는 “수수한 스타일을 선호해서 발색 립밤(입술 보습 화장품) 정도만 구매할 예정”이라며 “화려한 스타일을 좋아하는 친구들이 남자친구에게 색조 화장 도구를 선물하는 경우도 봤다”고 들려줬다.
과거 흔치 않았던 ‘화장하는 젊은 남성’을 기성세대는 어떻게 바라보고 있을까. 젊은 층을 중심으로 ‘남성의 외모 관리도 사회적 예의’라는 인식이 퍼지고 있다. 이에 대해 서울 당산동에 위치한 모 화학기업에서 인사를 담당하는 50대 여성 A씨는 “예전에 는 남자가 화장하면 면접에서 안 좋게 봤는데, 지금은 단정한 용모를 위한 메이크업이 당연해졌다”고 평가했다. 물론 일각에서는 여전히 남자가 외모 관리에 열중하는 데 거부감을 표출한다고도 전했다. “업계 특성상 화학산업은 남초 성향이 강하기 때문 에 여전히 화장하는 남성을 꺼리는 분위기도 남아 있다”라며 맨즈뷰티를 향한 시선이 조직 문화에 따라 상이할 것 같다는 입장을 내비쳤다.
티 안 나게…피부 보정 수요 높아
“티 안 나게 잘생겨지자.” 올리브영 남성 화장품 존에서 가장 많이 보이는 광고 문구다. 이 같은 문구는 맨즈뷰티 유튜브 채널에서도 쉽게 찾아볼 수 있 다. 아직 한국 남성들이 화장했다는 사실을 드러내는 데 다소 거부감이 있기 때문이다. 이는 상당수 남성용 메이크업 제품이 피부결 정리, 피부 톤 보정에 특화된 이유이기도 하다. 톤 보정의 경우, 피부색을 전체적으로 균일하게 하면서도 더 하얘지게 만드는 화장품 기능을 의미한다.
국내 유튜버 ‘익재’는 맨즈뷰티를 주력 콘텐트로 구독자 3만 명을 달성했다. 영상을 제작하기 위해 시중에 유통되는 남성용 화장품 대부분을 써봤다고 자부하는 그는, 국내 맨즈뷰티 시장의 특징으로 파운데이션(피부 톤을 보정하는 화장품의 일종, 색조 화장을 하기 전에 바탕으로 사용) 집중 생산을 꼽았다.
“국내 남성 화장품 업체 중 파운데이션만 만들고 셰이딩(얼굴에 음영감과 입체감을 주는 색조 화장품의 일종)은 제작하지 않는 곳이 많다”는 게 그의 설명이다. 또 “본격적인 화장에 속하는 셰이딩을 부담스러워하는 남성들이 많아서 판매 자체를 하지 않는 것 같다”고 현재 시장을 평가했다.
이렇듯 자연스러운 피부 보정에 대한 높은 수요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제품이 톤 로션(Tone-Lotion)이다. 톤 로션은 아모레퍼시픽의 스타일링 브랜드 비레디(B.Ready)에서 출시한 피부 보정, 멀티 기능성 로션이다. 출시 직후부터 한 달간 올리브영 남성 카테고리 부문 1위를 차지했을 정도로 큰 인기를 끌었다. 실제 사용자 후기를 보면, 톤 로션이 파운데이션보다 보정력은 약해도 이질적인 느낌이 훨씬 덜하다는 평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비레디 측은 “톤 로션은 기획 단계에서 자연스러운 피부 톤 보정과 화장한 티 없는 깔끔함을 목표로 삼았다”며 상품 개발 의도를 설명했다.
업계 관계자들은 당분간 남성 화장품이 자연스럽게 외모를 보완하는 기능에 집중할 것이라고 입을 모았다. 남성들이 갈수록 외모 관리에 더 큰 관심을 두는 만큼, 향후에는 색조 화장 시장도 확대될 수 있다는 관측도 나왔다.
외모 관리를 열심히 하는 남성들은 어느덧 색조 화장까지 조금씩 시도하는 데 반해, 무심한 남성들은 여전히 기초 제품도 안 바르는 경우가 허다하다. 이는 남성 화장품 시장의 잠재적 고객이 아직 많이 남아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K-뷰티의 블루오션으로 떠오르다
새로운 소비자를 유입시키기 위한 각축전은 이미 시작됐다.
CJ올리브영의 PB 브랜드(Private Brand) 아이디얼 포맨(Ideal-For-Man)은 작년 8월, 유튜버 ‘침착맨’과 올인원 제품의 광고 프로모션을 진행했다. 침착맨은 구독자 약 270만 명을 보유한 유명 유튜버로, 올해 만 41세가 된 중년 남성이다. 뷰티업계 특성상 소위 ‘아저씨’를 발탁한 것을 두고 업계에서는 다소 이례적이라는 반응도 있었다.
이에 대해 CJ올리브영은 “일반 남성에게 친숙한 침착맨과의 협업을 통해 해당 제품이 더욱 대중적인 공감을 얻길 바랐다”고 설명했다.
최근 2030세대 사이에서 ‘올리브영의 대항마’로 떠오른 다이소 역시 뷰티 분야를 확장하는 데 주력하고 있다. 2021년 4종에 불과하던 다이소 화장품은 작년 7월 기준 346종으로 증가했다.
직접 다이소 매장을 방문해 봤더니 가장 눈에 띄는 특징은 입구와 가장 가까운 위치에 뷰티 코너를 배치한 점이었 다. 다이소 점원에게 그 이유를 묻자 “최근 미용 제품을 찾는 소비자가 많아서 다른 매장들도 내부 배치를 비슷하게 한다”는 답변이 돌아왔다. 이어 “특히 남성용 제품의 경우, 부담 없는 가격과 뛰어난 품질로 입문자에게 사랑받고 있다”고 덧붙였다.
그 반대편에서 하이엔드(High End) 시장 역시 활발해질 가능성도 높지만 아직 갈 길이 멀다.
화장품기업 에프지뷰티(FG Beauty)는 “K-팝 열풍에 힘입어 K-뷰티가 해외에서도 맹위를 떨치는 것은 맞지만, 여전히 하이엔드 시장에서는 국내 기업이 유럽 브랜드를 당해내기엔 역부족”이라고 토로했다. 소위 ‘박힌 돌’인 유럽 브랜드를 이겨내기에는 무리라는 말이다. 국내와 해외 브랜드의 결정적 차이는 결국 자본이라는 게 그의 설명이다. 그는 “현재 유럽 명품 브랜드와 국내 브랜드 간 자본력 차이가 상당하다”며 국내 브랜드의 투자 활성화 없이는 유럽과 경쟁하기란 사실상 불가능하다고 짚었다.
전망이 어두운 것만은 아니다. 특히 성장 가능성 에 대해서는 낙관적으로 평가했다. 그는 “국내 남성 화장품 시장의 인프라가 잘 구축되는 점은 주목할 만하다. 미래가 기대된다”며 맨즈뷰티 시장이 한층 성장하기 위해서는 아직 시장에 익숙지 않은 ‘잠재 적 고객층’을 포용하기 위한 맞춤형 전략을 수립하 는 게 급선무라고 강조했다.
우준성 월간중앙 인턴기자 wnstjddl21@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