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실과 학식이 같았던 피히테

2025-09-10

젊은 날의 학창 시대에는 마구잡이로 책을 읽던 남독(濫讀)의 낭만이 있었다. 이때 만난 좋은 책이 일생을 좌우한다는 점에서 책도 인연이다. 나는 대학 초학년 무렵에 문화 사업의 일환으로 삼성문고에서 발간한 피히테(Johanne G, Fichte:1762~1814·사진)의 『독일국민에 고(告)함』을 미친 듯이 읽으며, 나도 언제인가 이런 책을 한번 써보고 싶다는 부황(浮黃)한 생각에 사로잡힌 적이 있었다.

피히테는 독일 작센주에서 넉넉지 않은 방직공의 아들로 태어났다. 명민했으나 가정이 넉넉지 못한 탓에 정규학교에 들어가지 못하고 아버지에게 교육을 받다가 이웃한 귀족 폰 밀티즈(Reiher von Miltiz) 남작의 도움을 받아 예나대학과 라이프치히대학에서 공부할 수 있었다. 평생에 의인을 만나는 것보다 더 큰 축복이 없다. 격동의 시대인 이 무렵, 신성로마제국이 무너지고 나폴레옹제국의 수립과 함께 독일이 프랑스에 함락되자, 피히테는 베를린 학술원에서 프랑스 병정의 군화와 말발굽 소리를 창밖에 들으며 10차에 걸쳐 ‘독일 국민에 고(告)함’(1807~1808)이라는 목숨을 건 연설을 남겼다. “시와 언어와 역사를 잃지 않는 민족은 멸망하지 않는다”는 것이 연설의 핵심이었는데, 한국의 신채호(申采浩)와 같은 민족주의자에게 깊은 감동을 주었다.

훗날 베를린대학 총장에서 물러났을 때 신성로마의 해체 과정에서 독일은 전쟁의 소용돌이에 빠졌다. 1814년, 그의 나이 52세 때, 그는 군대에 입대하려 했으나 고령이라는 이유로 거절되었다. 그때 아내 요한나는 간호병으로 지원하여 전선에 투입되었다. 이에 피히테는 아내의 조수로 입대하여 활약하다가 전시 전염병에 감염되어 타계했다. 한 나라 제일의 국립대학 초대 총장이 아내의 조수로 조국 전쟁에서 순국하였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을 만큼 우리에게 감동을 준다. 우리의 현실을 보노라면 더욱 그렇다.

신복룡 전 건국대 석좌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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