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 7월 21일 부산지역 고등학생 19명이 개최한 기자회견의 제목은 ‘고교학점제, 누구를 위한 제도인가?’다. 학생들이 정부에게 묻는다. 누구를 위한 제도냐고? 학생보다 제도가 중요하냐고? 한두 학년쯤 피해 봐도 괜찮냐고? 그 한두 학년이 자그마치 87만명이다. 이재명 정부가 고교학점제를 밀어붙인다면 현재 고등학교 1학년 42만5400명, 중학교 3학년 44만8999명의 학생들에게 나쁜 정부·나쁜 대통령으로 오래도록 기억될 것이다.
지난 9월 25일 교육부가 발표한 ‘고교학점제 운영 개선 대책(안)’(이하 대책)은 자퇴를 심각하게 고민하는 고1·중3 학생들의 절박함을 철저히 외면한 엉터리 대책이다. 단지 교사 업무 과중 문제만 해결한 교사용 대책이다. 모든 학생의 기초학력을 보장한다던 ‘최소 성취수준 보장지도’조차 교사 편의를 우선하여 기초학력 포기 방안을 대책이라고 내놓았다. 고교학점제와 패키지로 추진되던 대학 입시 개선(수능 절대평가 등), 특권학교(자사고·외고·국제고 등) 폐지를 언제 어떻게 실현할지 일언반구도 없다. 무엇보다 교육부는 현 고1 학생들이 목 놓아 외치는 수강 과목 변경권 보장 요구를 묵살했다.
고1 학생에게 학교·학과를 특정하는 진학 지도라니, 이게 무슨 과목 선택권 보장인가? 진로 결정을 종용하고 입시 과열만 앞당길 뿐, 사교육 컨설팅과도 거리가 먼 시골 지역 학생들은 눈 뜨고 코 베인 셈이다.
정부가 내세운 고교학점제의 취지는 학생의 과목 선택권 보장, 학생 중심 개별화·맞춤형 교육이다. 학생들이 고교학점제를 거부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고등학교 1학년 2학기 초에(9월경) 졸업할 때까지 수강할 과목의 신청을 전부 마감하고(일부 2학년 말까지 수강 신청한 학교도 있음), 수강 변경이 불가하다는 게 문제다. 대학에서 이런 일이 벌어졌다면, 기가 찰 노릇이다. 교육부에 문의한 결과 시스템상 수강 변경이 가능하다는 원론적인 답변만 돌아올 뿐, 일선 학교에서는 수강 변경이 불가하다는 가정통신문이 버젓이 배포되고 있다. 학생에게 과목 선택권을 보장하려면, 매 학기 과목 변경권도 보장돼야 한다. 이래서 가짜 선택권이라는 비난을 받는 것이다.
대학들은 6월 말부터 학과별 권장이수과목(이수추천과목)을 발표했다. 대학 측은 입시에 ‘필수는 아니’라고 하지만, 고등학교 때 무슨 과목을 수강했는지에 따라 특정 학교·학과에 입학하기 유리한 시스템이다. 이처럼 대입에 직결된 전체 학년 수강 신청을 1학년 1학기 마치자마자 마감하다니, 학생·학부모들이 한 시간에 수십만원 하는 사교육 컨설팅 업체를 찾는 게 조금은 이해된다. 사교육 시장은 때아닌 고교학점제 특수를 누리고 있다. 진로 고민도 제대로 못 해본 고1 학생에게 학교·학과를 특정하는 진학 지도라니, 이게 무슨 과목 선택권 보장인가? 진로 결정을 종용하고 입시 과열만 앞당길 뿐, 사교육 컨설팅과도 거리가 먼 시골 지역 학생들은 눈 뜨고 코 베인 셈이다. 학생들이 자퇴를 진지하게 고민하는 이유도 여기 있다. 교육부는 지금이라도 모든 학생의 수강 과목 변경권을 제도적으로 보장하라. 그리고 초·중학교 진로 교육, 진로·융합 선택 과목을 가르칠 교사 연수·강사 확보, 대면 교육을 통한 기초학력 보장 등 고교학점제 시행의 전제조건을 충족할 때까지 무기한 유예하라. 학생은 실험동물이 아니다!
<장하나 ‘정치하는 엄마들’ 활동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