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쓰미마센'의 뿌리 '다테마에' [임병식의 일본, 일본인 이야기]

2025-02-22

겉과 속이 다른 일본인을 이해하는 게 어렵다고 한다. 또 과도한 친절과 모호한 언어습관에 주의해야 한다고 한다. 흔히 회자되는 일본인을 규정하는 국민성이다. 부정적인 뉘앙스로 언급하지만 일본인만의 특성은 아니다. 일본인에게서 유달리 이런 정서가 강하기 때문일 것이다. 상대를 배려한 듯싶지만 애매모호하기까지 한 언어습관과 국민성은 어디에서 비롯됐을까. 우리는 그렇지 않을까. 본심과 겉치레 정도로 쓰이는 ‘혼네(本音)’와 ‘다테마에(建前)’는 일본인의 특징을 설명할 때 쉽게 인용한다. 권력자나 공권력에 순종적인 일본인과 달리 한국인은 저항 기질이 강하다. 경제대국 중국과 일본을 ‘뙤놈’, ‘쪽바리’로 부르는 나라는 한국인이 유일하다. 또 왕조시대 숱한 민란부터 현대사회 대규모 집회까지 한국인은 부당하다고 생각되면 국가권력과도 기꺼이 맞섰다. 숨죽이며 순응하는 일본인과 크게 구분되는 지점이다.

일본 전문가들은 혼네(본심)와 다테마에(겉마음), 그리고 과도한 친절을 이해하는 코드로 ‘사무라이 문화’와 ‘와(和) 문화’에서 찾는다. 일본은 1185년 수립된 가마쿠라 막부부터 1868년 붕괴된 에도 막부까지 무려 700년 동안 사무라이가 지배한 칼의 나라였다. 사무라이 집단은 칼을 상시 휴대하고 걸핏하면 사람을 죽였다. 살벌한 사회에서 목숨을 부지하려면 본심을 감춰야 했다. 지금도 그렇지만 하고 싶은 말도하고 장수까지 누리는 사회는 흔치 않다. 직장에서 쫓겨나거나 따돌림 당한다. 하물며 목숨이 오가는 사무라이 시대, 공동체를 깨뜨리는 튀는 언행은 죽음을 의미했다. 공동체에 순응하는 ‘와(和) 문화’ 또한 겉치레에 능한 다테마에로 이어졌다. 촌락 공동체에서 마을의 질서를 어길 경우 가해지는 집단 따돌림을 뜻하는 ‘무라하치부(村八分)’는 가혹했다. 유령인간으로 취급하는 이지메를 피하려면 싫어도 좋은 척, 과장된 친절을 통해 공동체에 자신을 맞추는 수밖에 없었다. 혼네와 다테마에는 이런 문화적 산물이다.

목숨을 부지해야 하는 사무라이 정권, 공동체와 조화를 꾀해야 하는 와 문화는 일본 국민성의 원형질이다. 과도하다 싶은 친절 또한 여기에서 비롯됐다. 칼 든 사무라이 앞에서 살아남는 길은 면종복배와 위장된 친절, 웃음이었다. 본심은 감추고 비위를 맞춰야 생존 확률은 높았다. 일본인들이 입에 달고 다니는 “쓰미마센(미안합니다)”은 정말 미안해서가 아니라 무의식적인 언어습관에 불과하다. 일본인들은 미안해하지 않아도 될 일에도 “쓰미마센”이라고 한다. 40년 전 처음 일본에 갔을 때는 “쓰미마센”을 진심으로 여겨 주변에 ‘일본은 친절한 나라’라고 했다. 언제부터인지 일본에서 듣는 “쓰미마센”은 공허한 울림으로 다가왔다. 이는 혼네와 다테마에가 다른 일본인을 쉽게 믿지 말라는 편견으로 확장됐는데, 일본인조차 “쓰미마센”을 정말로 미안하다는 뜻으로 여기는 이가 있을까 싶다.

혼네와 다테마에를 떠올릴 때마다 잊히지 않는 기억이 있다. 30여 년 전 가나자와(金澤) 시 초청으로 이시카와(石川) 현을 공식 방문했을 때다. 다다미가 깔린 전통 요정에서 만찬이 있었고, 가나자와 시장은 10분정도 늦었다. 그는 만찬장에 도착하기 무섭게 여닫이 문 앞에서 무릎을 꿇고 수차례 허리를 굽혀 “쓰미마센”이라며 사과했다. 그는 6선 시장으로서 머리 희끗한 70대 초반이었다. 누구도 그가 예의를 저버렸다고 생각하지 않았고, 그 정도는 늦을 수 있다고 여겼기에 우리 일행은 다소 당황했다. 당시 ‘일본인들은 예의가 바르다’고 탄복했는데, 훗날 그때 행동은 보여주기 위한 다테마에는 아니었는지 혼동됐다. 정치인으로서 사무라이 관습대로 사과한 것은 아닌지 싶었다. 아마 사무라이 시대였다면 그는 영주가 주관하는 회의에 늦었다는 이유로 죽음을 피하기 어려웠을지도 모른다.

좀처럼 속내는 보이지 않는 국민성 때문인지 일본인을 친구로 만드는 것도 쉽지 않다. 중국인은 첫 만남에서도 “따거(형님)”라며 쉽게 마음은 여는 반면 일본인은 좀처럼 곁을 내주지 않는다. 가깝게 지내는 일본인 가운데 주한 일본대사관 소속 외교관들이 있었다. 그들과 나는 매월 돌아가며 식사비용을 부담하며 1년 넘게 만남을 이어갔다. 허물없는 관계라고 여길법했건만 그들과 끝내 호형호제를 못한 채 헤어졌다. 그들은 내 호칭을 “임상”으로 부르는 것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한국을 떠났다. 이따금 SNS를 통해 안부를 주고받지만 끈끈한 인관관계를 중요시하는 한국인으로서는 왠지 허전했다. 대학 시절 연수 때도 느꼈지만 선을 넘지 않는 평행선을 유지는 일본의 국민성을 거듭 확인한 계기였다. 그들이 나를 다테마에로 대했다고 생각하지 않지만 아쉬움이 남는 건 어쩔 수 없다.

아이보시 고이치(相星孝一) 전 주한 일본대사 또한 기억에 남는 관료다. 그가 대사로 있을 때 정세균 전 총리와 오찬을 주선했다. 아이보시 대사는 리모델링한 일본대사관도 소개할 겸 솜씨 좋은 일본 요리사가 만드는 음식을 대접하고 싶다고 했다. 우리 측은 일본대사관에서 오찬이 불러올 구설을 우려한 나머지 다른 장소를 제안하며 완곡하게 거절했다. 이후 다시 잡자고 했으나 본국으로 귀국하는 바람에 지키지 못한 약속으로 남았다. 한국 근무만 세 차례, 우리말이 유창한 아이보시 대사는 외교가에 이름난 친한파다. 여러 자리에서 한국에 대한 그의 진심을 숱하게 접했기에 나는 한국에 대한 그의 혼네를 의심치 않는다. 오히려 반일정서를 의식해 오찬 장소마저 흔연스럽게 받아들이지 못한 우리가 다테마에는 아니었는지 돌아본다. 한국인의 저항정신과 겉치레 또한 시대 상황과 무관하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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