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의 앨범

2025-01-14

아버지의 첫 번째 기일이 가까워지자 나는 뭔가 의미 있는 일을 하고 싶어졌다. 의례적인 제사를 떠나 당신을 기릴 수 있는 게 뭘까 고민하다가 찾아낸 게 바로 사진이었다. 아버지가 나온 사진을 모아 동영상으로 만들어 가족들이 함께 보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 형제들에게 연락을 돌렸다. 그런데 예상했던 것과 달리 형제들의 핸드폰 속에 들어 있는 아버지의 사진은 그다지 많지 않았다. 거의 없다고 하는 게 더 정확한 표현이었다. 변명보다는 부끄러움이 앞섰다. 며칠 고민 끝에 내가 찾아낸 해법은 앨범이었다. 언젠가부터 고향집 장롱 깊은 곳으로 밀려난 여러 권의 앨범을 그동안 까맣게 잊고 지냈던 것이다.

첫 기일 기리려 꺼내 펼쳤지만

결혼 사진조차 남아있지 않아

엄마 감자적 꾸역꾸역 씹을 뿐

그래, 앨범을 펼치면 되는 거야! 그 앨범 속 사진에는 우리 가족의 지난날들이 고스란히 담겨 있을 터였다. 앨범을 찾아 고향집으로 달려가는 길은 내내 즐거웠다. 우리 집은 다른 집과 달리 앨범이 늦게 등장했다. 그렇다고 벽에 걸어놓는 사진액자가 있었던 것도 아니어서 어쩌다 사진이 들어오면 서랍 속에 보관하는 게 전부였다. 어린 시절 친구들 집에 놀러 가면 가장 먼저 하는 일이 바로 벽에 걸린 액자 속 사진들을 구경하는 거였다. 그중 가장 이채로웠던 것은 월남전에 참전했던 친구 아버지의 사진들이었다. 나는 마치 월남을 여행하듯 그 사진들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그 친구의 집에는 액자도 모자라 월남 사진이 빽빽하게 들어찬 앨범까지 있었다. 부럽지 않을 까닭이 없었다. 우리 집엔 왜 앨범이 없단 말인가. 친구들 집에서 앨범을 보고 오는 날이면 나는 늘 그게 억울했다.

고대하던 앨범을 우리 집에 처음 들여놓은 건 객지에 나가 직장생활을 하던 형이었다. 그다음은 중학교를 졸업하고 일찍 직장생활을 시작한 큰누나였다. 나는 서랍에 있던 사진들을 두툼한 앨범 속에 넣는 일이 그렇게 즐겁다는 걸 처음 알았다. 그 안에 내 사진들도 하루빨리 넣고 싶었다. 하지만 아직 초등학생인 내가 산골에서 사진을 찍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동안 내가 찍은(찍힌) 사진이라곤 10장을 채 넘지 않았다. 가장 처음의 돌 사진, 운동회 날 마을 사진사가 찍어준 사진, 소풍날에도 따라온 사진사가 소나무밭에서 찍은 사진, 어느 겨울 외사촌 형이 사진기를 빌려와 찍은 사진이 전부였다. 이후 초등학교 때 찍은 마지막 사진은 졸업앨범에 들어갈 단체 사진이었다. 이 중에 개인 사진은 돌 사진이 유일했다. 나도 형과 누나처럼 잔뜩 폼 잡고 찍은 독사진이 갖고 싶었지만 불가능한 일이었다.

개인 사진기가 귀하던 시절이었다. 특별한 일이 있으면 사진관에서 사진기를 빌려야 했다. 그럼에도 우리는 사진기를 빌리고 필름을 구입했다. 마을의 명소를 찾아다니며 사진을 찍었다. 필름을 잘못 감아 한 통을 다 버리는 일이 생겨도 개의치 않았다. 찍고 또 찍었고 그 사진들을 찾아 앨범에 채웠다. 이제 필요한 건 나만의 앨범이었다. 중학교를 졸업하던 무렵에야 임기응변으로 누나의 앨범에 있던 사진들을 몽땅 꺼낸 뒤 나의 사진들을 한 장 한 장 끼워 넣었다.

12월의 마지막 날 고향집에 도착한 나는 장롱 깊은 곳에 있던 앨범을 거실에 꺼내놓고 앉아 아버지가 나온 사진들을 핸드폰으로 다시 찍었다. 자꾸만 키가 작아지는 어머니는 싱크대 옆에서 감자적을 부쳤다. 아버지는 어머니와 혼례식 사진도 찍지 못했구나. 사진 속 아버지는 관광버스 안에서 술병을 들고 춤을 추는구나. 아버지는 남해의 어느 섬에서, 금강산의 커다란 바위 앞에서, 주문진의 횟집에서, 회갑상 너머에서, 자식들의 결혼식장에서, 마지막으로 고향집에 도착한 장의차의 관 속에서…. 나는 허리가 아파 주먹으로 두드리며 어머니가 부친 감자적을 돌배술 안주로 꾸역꾸역 씹었다. 감자는 땅속에서 하늘을 봤는지 맛이 아렸다. 아버지는 자식들과 손주들이 만든 동영상 앨범을 어떻게 생각하실까. 혹시 사진이 맘에 들지 않는다고 역정을 내진 않을까. 빛이 바래가는 앨범 속 사진들을 찍으며 나는 조금씩 취해갔다.

엄마, 아버지와 혼례를 올린 게 몇 년도야? 잘 몰라. 그럼 몇 살 때 시집온 거야? 스무 살. 아버지는 엄마보다 두 살이 많으니 스물두 살에 장가를 갔다는 얘기다. 다시 앨범을 들여다보니 아버지는 할머니 산소 성묘를 마치고 내가 있는 곳으로 천천히 걸어오고 계셨다.

김도연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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