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대규모 언어 및 멀티모달 모델(LMM)이 발전하면서 AI는 전 세계의 미학과 문화를 하나의 기준으로 해석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디자인은 언제나 지역의 감성과 사회적 맥락 위에서 작동한다. AI가 놓친 그 감성을 되살리는 주체가 바로 디자인 기업이다.”
AI에게 “안젤리나 졸리와 김태희 중 누가 더 아름다운가?”라고 물으면 대부분 '안젤리나 졸리'라고 답한다. GPT를 비롯한 대규모 언어 및 멀티모달 모델(Large Multimodal Model, LMM)이 영어권 중심의 데이터를 기반으로 학습되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모델들은 방대한 텍스트와 이미지를 함께 학습하며 인간의 언어와 시각적 패턴을 결합해 추론하지만, 그 근간은 여전히 서구적 미학과 사고방식에 치우쳐 있다.
그 결과 AI는 전 세계의 '아름다움'을 하나의 글로벌 기준으로 해석한다. 하지만 한국 사회의 감성 코드와 문화적 미의식에서는 김태희라는 선택이 훨씬 자연스럽다. 이 차이는 단순한 취향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와 문화가 공유하는 감성 코드의 차이에서 비롯된다.
최근 연구에서도 이러한 문화적 편향(cultural bias)은 주요 이슈로 다뤄지고 있다. 스탠퍼드대, 메타 AI, 네이처 머신 인텔리전스 등에서 발표된 논문들은 대규모 AI 모델이 서구 언어 중심의 데이터 구조를 내면화하며 비서구권 감성이나 지역 문화 맥락을 충분히 반영하지 못한다는 점을 지적한다. 이른바 '문화적 정렬(Cultural Alignment)'이 새로운 연구 의제로 떠오른 이유다. AI가 기술적으로는 고도화되고 있지만, 정작 지역의 감성이나 문화적 다양성은 점점 희미해지고 있는 셈이다.
이 문제는 디자인 영역에서 더욱 명확하게 드러난다. AI가 아무리 방대한 데이터를 다뤄도, 그 기반이 서구 중심의 사고에 머문다면ㅇ한국적 감성이나 지역 산업의 디자인 맥락은 반영되기 어렵다. 결국 디자인 데이터의 가치는 이미지나 키워드가 아니라 그 사회가 가진 문화적 맥락, 감성적 판단, 산업적 배경을 함께 담는 데 있다. 보편적 기준이 아닌, 집단이 공유하는 감성의 언어 속에서 이해되어야 하는 것이다.
이를 가장 잘 보여주는 예가 자동차 산업이다.
교과서에서 말하는 디자인 프로세스가 '사용자 조사 → 아이디어 발산 → 콘셉트 도출 → 시제품 제작'이라면, 자동차 산업의 현실은 훨씬 복잡하다. 디자인 초기부터 안전성, 제조비용, 기술 제약, 규제, 감성 UX가 동시에 작동한다. 예를 들어 자동차 인테리어 디자인을 결정할 때 디자이너는 단순히 “예쁘다”를 넘어, 운전자의 시선 이동, 주행 중 조작의 인지 부하, 탑승자의 촉각적 감성, 지역별 색채 선호도, 그리고 안전규제나 배터리 구조 제약까지 함께 고려해야 한다.
이처럼 자동차 디자인은 형태의 문제가 아니라 맥락의 문제다. 디자인 기업이 이런 프로젝트를 수행하며 축적한 데이터는 글로벌 모델이 접근할 수 없는 산업별 감성 데이터다. 이는 '일반화된 전략'이 아닌, 각 산업과 시장의 현실적 맥락을 반영한 살아 있는 디자인 논리다.
문제는 현재의 AI가 이런 데이터를 학습하지 못한다는 점이다. GPT를 비롯한 대부분의 LMM은 영어 중심의 데이터로 학습돼 미국식 디자인 언어와 사고방식이 강하게 반영돼 있다. 반면 국내 디자인 기업들은 다양한 산업 프로젝트를 통해 한국적 감성, 사회적 맥락, 산업별 특성이 내재된 실전 데이터를 이미 보유하고 있다.
이 데이터는 단순한 결과물이 아니라 디자인이 그 사회와 산업 안에서 어떻게 받아들여졌는지에 대한 경험의 기록이다.
따라서 디자인 기업은 단순히 결과물을 만드는 조직이 아니라, AI가 세계를 단일 기준으로 해석하지 않도록 돕는 '감성 인터프리터 (Sensibility Interpreter)'가 되어야 한다. 이들이 가진 실전 데이터는 글로벌 모델의 시야를 넓히고, AI가 지역의 감성과 산업 현실을 이해하도록 만드는 문화적 균형추가 된다.
AI 시대의 디자인 기업은 이제 형태를 만드는 조직이 아니라 산업별 감성과 문화적 맥락을 데이터로 해석해 전략으로 전환하는 지식 인프라 기업으로 진화해야 한다. 그들이 가진 실전 데이터는 글로벌 모델이 놓치고 있는 국가별 감성 코드를 보완하고, 산업별 디자인 전략을 문화적으로 현지화하며, 국가 차원의 디자인 경쟁력과 문화지능(Cultural Intelligence)을 높이는 기반이 된다.
나아가 이러한 변화는 디자인 기업에게 새로운 비즈니스 모델의 기회를 연다. AI가 제대로 작동하기 위해서는 방대한 양의 맥락적·감성적 데이터가 필요하다. 디자인 기업이 그동안 축적해 온 프로젝트 경험과 감성 데이터를 체계적으로 가공하고 정제한다면 그 자체가 '디자인 데이터 가공 산업(Design Data Refinement Business)'으로 발전할 수 있다.
이는 단순히 AI를 활용하는 차원을 넘어, AI가 작동할 수 있는 감성 데이터 생태계를 공급하는 산업적 전환이다. 즉, 디자인 기업은 이제 디자인 결과물을 파는 회사를 넘어 AI가 감성을 이해하도록 돕는 데이터 인프라 기업으로서 국가 디자인정책과 산업혁신의 새로운 축이 될 수 있다.
AI가 세상을 영어로 해석할 때, 디자인 기업은 세상을 감성으로 해석한다. 그리고 그 감성을 데이터로 바꾸는 순간, 디자인 산업은 완전히 새로운 시대를 맞이한다.
안진호 한국디자인산업연합회 부회장 안진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