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최고의 아연제련소 꿈꾼 '영원한 도전자'...최창걸 고려아연 명예회장은 누구

2025-10-06

'비철금속 제련 분야 세계적 전문가' 평가

'기본에 충실하자'는 신념으로 이룬 12조 매출 신화

[서울=뉴스핌] 김양섭 기자 = 최창걸 고려아연 명예회장은 비철금속 제련 분야의 세계적 전문가이자, 고려아연을 글로벌 최고 수준의 기업으로 성장시킨 탁월한 경영인으로 평가받는다.

최 명예회장은 1941년 황해도에서 고(故) 최기호 고려아연 초대회장의 6남3녀 중 차남(5남 2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으며, 1960년 경기고등학교 졸업 후 서울대학교 상과대학 경제학과 학사와 미국 콜롬비아대학교 경영대학원에서 MBA를 취득했다.

최 명예회장은 1974년 고려아연을 창립한 이래 부친의 기업가 정신을 이어받아 고려아연을 세계적 경쟁력을 지닌 글로벌 1위 비철금속 기업으로 이끄는데 모든 것을 바쳤다. 자원 빈국인 우리나라에서 비철제련업을 최초로 시작하여 불과 30여년만에 100년 이상의 역사를 가진 전세계 제련소들을 추월하며 세계제일의 종합비철회사로 성장시켰다.

최창걸 명예회장은 고려아연 설립을 준비할 당시부터 어려운 과제에 직면했다. 1973년 정부에서 '중화학공업 육성계획'을 발표했고, 당시 아연, 연 광산 사업을 하던 우리 회사가 제련업종을 담당하는 회사로 선정됐다. 그는 특히 그는 정부, 금융회사 등 여러 관계자들과 수없이 만나 협의한 끝에 1974년 8월 1일 단독회사를 설립하게 됐다.

무엇보다 사업에 필요한 자금 확보가 문제였다. 최창걸 명예회장은 자금 마련을 위해 국내에선 국민투자기금과 산업은행 등에서 빌렸고, 수소문하다보니 IFC(International Finance Corporation, 후진국 민간기업에 투자하고 자금을 빌려주는 세계은행 산하 국제기구)를 알게 됐다. IFC에서 사업자금으로 7천만달러(한화로 약 700억)가 필요할 것이라고 했지만, 그는 5천만달러에 해낼 수 있다 설득했다. 이후 턴키방식이 아닌 직접 구매에서 건설까지 하는 방법을 택했고, 결국 IFC의 예상을 뒤엎고 4500만달러로 공사를 완성했다.

최 명예회장은 이어 대단위 제련소 건설을 위한 마스터플랜을 준비했다. 온산 비철단지 내에 제련소를 설립할 때부터 기술 수준과 규모 면에서 세계 최고의 제련소를 건설한다는 밑그림을 그리고, 대단위 아연제련소 건설에 대한 경험이 일천했던 국내 현실을 감안해 기본계획과 프로세스 특허를 외국에서 도입하는 것이 최선이라고 판단했다. 투자시에는 비용절감이나 효율성을 따지기보다 최신 기술과 미래 연관 사업과의 상호 보완 관계에 무게 중심을 두는 장기 전략을 채택했다.

1978년 4월 공장이 설립됐으나, 시운전 및 정상화하는데 2년이란 시간이 흘렀다. 기술도 경험도 없었기에 시간이 많이 걸린 것은 무리가 아니었다. 최 명예회장은 이 기간 경영관리체계를 정비하여 온산제련소가 빠르게 정상가동 될 수 있도록 온 힘을 다했다.

아무것도 없는 땅에 비철금속 회사를 만드는 것을 꿈꾸고 제련소를 건설했던 것처럼 최 명예회장의 도전정신은 끊임없는 기술개발과 설비투자로 이어졌다. 1980년부터 1992년까지 사장과 부회장 재임 시에는 고려아연 기술연구소 설립과 국제경쟁력을 갖추기 위해 생산시설 확장에 힘을 쏟았다. 아연/연/동제련 통합공정, DRS(Direct Reduced Smelting)공법의 연제련공장을 착공과 더불어 아연괴 런던금속거래소(LME) 등록으로 경쟁력을 강화했다. 또한, 1990년 기업공개를 추진해 투명경영 실현과 국민적 기업으로 도약하는 기반을 마련했고, 1983년 영풍정밀, 1984년 서린상사, 1987년 코리아니켈 등 계열사를 설립해 그룹의 기반을 확대하고 사업간 시너지 효과를 창출했다.

최 명예회장은 1992년 3월 회장 자리에 올랐다. 회장 취임 이후에도 '원칙에 어긋나는 것은 하지 말고 기본에 충실하자'라는 신조에 맞춰 고려아연의 성공을 위해 매진했다. 아연공장 및 연 제련 공장을 계속 증설해 나갔고, 호주에 아연제련소 SMC를 설립하며 글로벌 사업기반을 확대해 나갔다.

한편으로, 최 명예회장은 제련산업을 공해산업이 아닌 친환경사업으로 만들어가는 노력을 꾸준히 펼쳐 나가 자원의 효율적인 활용과 녹색경영을 실현하는데 이바지했다. 그중 하나로 아연 잔재를 환경 친화적인 청정슬래그 형태로 만들어 시멘트 원료로 판매하는 등 아연잔재 재처리 기술을 상용화했다. 이 기술로 고려아연은 전세계 아연 제련소들의 공통적인 고민이었던 아연잔재를 친환경적으로 해결함으로써 세계적인 회사로 발돋움하는 계기를 마련했다.

2002년 이후 명예회장으로 한발 물러 난 뒤에도 지속적으로 회사의 기술과 경영에 도움을 주었다. 환경친화기술 등 첨단 신기술개발에 매진함과 동시에 해외 자원개발과 희소금속 및 도시광산사업 등 미래성장동력 확보와 자원강국의 꿈을 실현하기 위해 노력했다.

자원 리싸이클링 전담 부서를 신설해 국내외에서 발생하는 산업용 자동차용 폐배터리, 폐인쇄회로기판, 아연재 등을 적극적으로 수거해 원료로 사용하는가 하면 유가금속을 다시 회수함으로써 폐기물의 무분별한 처리를 막았다. 고려아연이 연간 100만 톤이 넘는 각종 광석 및 재생물질을 제련하는 과정에서 회수하는 금, 은, 인듐, 안티모니 등의 희소금속들은 고부가 가치를 창출하며 회사의 수익성을 높이는데 기여했다.

최 명예회장의 지속적인 투자와 기술개발의 결과는 창업초기와 경영성과를 비교해 보면 아연 생산 능력은 연 5만톤에서 65만톤, 매출액은 114억에서 12조 원 수준까지 늘어났다. 회사가치의 척도인 시가총액도 최대 20조원에 육박하는 등 괄목할 만한 성장세를 이루었다. 선대의 창업 터전 위에 수성을 한데서 더 나아가 고려아연의 제2의 도약을 이끌며 세계적 기업으로 성장시켰다고 평가할 수 있다.

또한, 최 명예회장은 인재를 중시하고 노사화합을 실천해왔다. 최신기술과 설비도 중요하지만 사람이 제일 중요하다는 생각으로 장학사업을 비롯해 임직원들의 해외연수를 꾸준하게 실시해 왔으며, 늘 부하직원들의 노고를 살피는 등 덕장의 리더십으로 노사 상생의 탄탄한 토대를 만들었다. 이와 함께, 기업인의 기본 원칙을 충실히 지키고, 공사가 분명하여 인재 채용이나 업무 처리에서 공정성과 투명성을 강조했다.

1981년 명진보육원 후원을 시작으로 아동복지분야에 끊임없이 애정과 관심을 가지고 사회적 책임 실천에 앞장서 왔으며, 많은 학교와 학생들에게 장학금을 지급하며 학자금 문제로 중도에 학업을 포기하지 않도록 했다. 이후로도 회사는 기업시민의 일원으로서 이익의 일정액을 반드시 사회에 환원해야 한다는 원칙을 실현하며 대한적십자사, 사회복지공동모금회 등 사회복지단체와 상호협력적 관계를 구축해 나가면서 사회공헌활동의 범위를 확대해 나갔다.

최 명예회장은 임직원들에게도 사회공헌 활동을 적극 권장했다. '고려아연 전 임직원 기본급 1% 기부하기 운동' 및 매칭그랜트를 통해 기부의 중요성에 대해 알렸고, 임직원들이 자발적으로 구성한 회사내 자원봉사회 활동에 최 명예회장이 솔선수범함으로써 임직원들의 귀감이 되었다.

사회복지공동모금회의 1억원 이상 고액기부자 모임인 아너소사이어티의 회원인 최 명예회장은 이후 부인인 유중근 경원 문화재단 이사장과 아들인 최윤범 회장이 아너소사이어티에 가입을 하며, '패밀리 아너'로 기록됐다. 이런 사회 공헌 활동의 공을 인정받아 최 명예회장은 2013년 대한민국 나눔국민대상에서 '국민훈장 동백상'을 수상했다.

가족으로는 대한적십자사 총재를 역임한 유중근 총재와 결혼해 최윤범 고려아연 회장을 비롯해 2남1녀를 두었다.

최 명예회장은 이날 별세했다. 향년 84세. 고려아연은 서울 종로구 연건동 서울대병원에 입원해 치료받던 최 명예회장이 이날 숙환으로 타계했다고 전했다. 최 명예회장의 임종은 부인인 유중근 여사와 아들인 최윤범 고려아연 회장 등이 지켰다. 최 명예회장의 장례는 오는 7일부터 나흘간 회사장으로 치러진다. 장례위원장은 이제중 고려아연 부회장이 맡았다. 빈소는 서울아산병원 장례식장 20호실에 마련되며 영결식은 오는 10일 오전 8시에 진행된다.

ssup825@newspi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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