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전쟁 와중인 1950년 12월 초 서울은 공황 상태에 빠졌다. “미국이 한국을 중국에 팔아넘기려고 한다”는 소문이 나돌았다. 50만 명이 피란길에 올랐다. 가짜뉴스가 아니었다. 미국은 북한의 6·25 남침 5일 만에 지상군 파견을 결정하고 맥아더의 인천상륙작전으로 한국을 살려냈다. 하지만 11월 24일 개시한 크리스마스 대공세가 참패로 끝나자 철수하려 했던 것이다. “그럴 거면 애초에 뭐 하러 참전했느냐”는 비판이 워싱턴에서도 나왔다. 이렇게 소용돌이치는 여론과 정치 기류에 따라 춤추는 것이 현실세계 속 강대국의 국제정치다.
트럼프 관세 폭탄 비판받지만
희망 잃은 미국민 분노가 옹위
자강, 전략적 자율성 확보가 관건
야당 포용, 협치로 내부 통합해야
12월 1일 워싱턴에서 국무·국방 장관 연석회의가 열렸다. 군 수뇌부는 “한국은 전략적 가치가 없다”며 철수 의사를 밝혔다. 애치슨 국무장관은 “한국인들은 살육당할 것”이라며 반대했다. 트루먼 대통령은 이듬해 1월 14일 철수 불가 결정을 내렸다. 하지만 철수론은 ‘바람 앞의 촛불’ 신세인 한국을 줄곧 괴롭혔다. 이승만 대통령은 ‘마스가(MASGA·미국 조선업을 다시 위대하게)’ 같은 협상 카드도 없이 빈손으로 트루먼, 아이젠하워 대통령과 담판해 미군을 상주시키는 한미상호방위조약을 쟁취했다.
예나 지금이나 강대국은 마음씨 좋은 산타클로스가 아니다. 힘이 약한 나라는 스스로 강해져 가치를 높이지 않으면 언제든 버림받는다. 국제정치의 이런 냉혹한 본질은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관세전쟁이 벌어지고 있는 2025년에도 작동하고 있다. 다만 지금의 한국은 산업이 없는 최빈국(最貧國)이 아니다. 반도체로 세계를 선도하고, 조선·원전·방산 분야에서 미국이 갑(甲)으로 모셔야 할 제조업 수퍼 강국이다. 천만다행이다.
워싱턴에 한국 경제 사령탑이 총출동해 미국 측과 관세 협상의 핵심인 3500억 달러 현금 투자의 구성과 방식을 놓고 절충을 시도했다. 재계 총수들도 트럼프와 골프를 치면서 간접 지원했다. 트럼프는 여전히 “3500억 달러는 선불(先拂)”이라는 비현실적인 주문(呪文)을 반복하고 있다. 역사학계의 거장 앤서니 G 홉킨스 케임브리지대 명예교수는 저서 『미 제국 연구』에서 트럼프 행정부의 관세정책에 대해 “스스로 발에 총을 쏜 셈”이라고 비판했다. 국제 분업과 자유무역에 기반한 전후 질서를 뒤엎은 경제 제국주의라는 것이다.
그러나 트럼프는 건재하다. 제조업이 무너져 희망을 잃은 미국 저소득 노동자의 들끓는 분노가 그를 단단히 지키고 있다. 한국인은 잘사는 미국을 위해 3500억 달러를 현금으로 투자해야 하는 이유를 납득하지 못한다. 그런데 트럼프는 관세전쟁을 시작하면서 “우리는 우리나라가 강간과 약탈을 당하도록 허용했다”며 “많은 부분이 우방들의 소행”이라고 했다. 한국이 동맹이라는 사실은 오히려 불리한 요소가 됐다. 중국은 한화오션의 미국 내 자회사 5곳을 제재했다. 트럼프가 중시하는 한국의 협상 카드 ‘마스가’를 정조준한 것이다. 한국은 한마디로 동네북 신세다.
어떻게 해야 이 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미국과의 동맹은 두말할 것도 없이 최우선이다. 그러나 사안별로 유연하게 대응하는 ‘전략적 자율성(strategic autonomy)’을 확보해야 한다. 특정 국가에 대한 과도한 의존은 금물이다. 자강(自强)과 균형을 추구해야 한다. 그래야 누구로부터도 무시당하지 않고 국익을 지킬 수 있다. 군사력을 강화하고 미·중 이외 지역으로의 수출입을 늘려야 한다. 일본이 주도하는 포괄적·점진적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CPTPP)에 EU와 함께 가입하는 것도 돌파구가 될 수 있다. 전 세계 GDP 30%에 해당하는 최대 단일 시장을 거머쥐게 된다. 지금처럼 미국, 중국만 쳐다보지 않아도 된다는 뜻이다. 생존을 위한 강력한 무기인 산업을 흔드는 반(反)기업 정책은 자해행위다. 정권과 무관하게 대외 정책의 일관성도 유지해야 한다.
EU·아세안·프랑스·인도·호주·베트남·싱가포르는 오래전부터 전략적 자율성 확보에 주력해 왔다. 인도는 서방과 중국·러시아 모두와 파트너가 되는 ‘인도의 길’을 가고 있다. 파편화된 세계에서 가장 유리하고 폭넓은 전략적 입지를 갖춘 나라다. 싱가포르는 중국의 경고를 무시하고 미국과의 합동군사훈련으로 안보 이익을 얻고, 중국과는 기술 교류로 경제 이익을 취하고 있다. 베트남도 미·중 균형 정책으로 실리를 취하고 있다. “휘지만 부러지지 않는다”는 대나무 외교(bamboo diplomacy)가 원동력이다. 한국도 전략적 자율성 확보를 위한 국민적 합의가 필요하다.
먼저 내부 통합과 초당적 대처가 절실하다. 이념을 기준으로 한 자주파·동맹파 갈등은 국익 중심 실용외교의 적(敵)이다. 야당을 무시하는 협량(狹量)의 정치로는 대외 정책의 일관성을 유지할 수 없다. ‘내란 정리’는 특검에 맞기고 대통령은 포용과 협치에 나서야 한다. 우리는 비핵화를 거부하는 북한과 마주하고 있다. 안보와 경제의 동시 위기다. 이재명 정부의 반성적 성찰이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