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돌아올 때까지 아무것도 하지 마.”
텔레비전 중계를 진행한 멜 존스(52)의 머릿속엔 경기 해설보다 더 중요한 임무가 있었다. 탈레반으로부터 아프가니스탄 여자 크리켓 대표팀을 탈출시키는 일이다. BBC는 존슨와 인터뷰를 통해 영화같은 탈출 스토리를 12일 공개했다.
2021년 탈레반이 아프가니스탄을 장악하면서 여성의 스포츠 활동이 전면 금지됐다. 당시 아프간 여자 크리켓 대표팀 선수 19명은 목숨을 걸고 조국을 떠나야 했다. 그들은 멜 존스를 비롯한 호주 내 크리켓 관계자들의 도움을 받아 호주로 탈출했다. 당시 팀의 주축 선수였던 피루자 아미리는 지금도 탈출 당시의 공포를 잊지 못한다. 그는 “자동차 검문소를 지날 때마다 심장이 멎을 것 같았다”며 “‘가족 결혼식에 간다’ ‘어머니 치료를 위해 파키스탄에 간다’는 변명이 통할 거라고는 생각도 못했다”고 말했다. 그는 “내 인생에서 가장 큰 기적이었다”고 덧붙였다.
팀 동료 나히다 사판 역시 탈레반이 집까지 찾아와 자신을 찾은 경험을 떠올렸다. 그는 “탈레반이 우리 집에 와서 남동생에게 ‘이 집에 크리켓 선수 여자가 살고 있느냐’고 물었을 때 정말 무서웠다”며 “나는 그날 밤 팀원들의 기록이 담긴 스코어북을 갈기갈기 찢어 쓰레기통에 버려야 했다”고 말했다. 그는 “내가 살아남을 수 있을지, 나와 가족이 아프가니스탄을 빠져나갈 기회가 있을지, 우리가 살 수 있을지 죽을지 몰랐다”고 덧붙였다. 탈레반 법 아래, 여성들은 대학, 스포츠, 공원 출입이 금지된다. 또한 여성들의 목소리가 집 밖에서 들리는 것도 금지돼 있다.
탈레반의 위협을 피해 그들이 찾은 ‘안전한 장소’는 처음에는 전혀 예상치 못한 곳, 바로 호주였다. 아프간 여자 크리켓 선수들의 절박한 상황은 한 인도 언론인을 통해 멜 존스에게 전달됐다. 존스는 이를 듣고 곧바로 친구인 크리켓 빅토리아 출신 엠마 스테이플스, 아프간 여자 축구팀을 구출한 경험이 있는 캐서린 오드웨이 박사와 손을 잡았다. 이들은 긴급 비자를 신청하고, 자금 지원을 모색하며, 현지 탈출 경로를 파악했다. 구출 작전은 6주간 지속됐고, 결국 선수 및 가족 120명을 호주로 데려오는 데 성공했다. 존스는 이 과정을 “제이슨 본 영화 같은 일이었다”고 회상했다. 그는 “중계석에서 해설을 하다가도 선수들에게 메시지를 보내며 피신 경로를 안내해야 했다”며 “한 선수가 탈출 차량을 찾지 못해 길을 헤매고 있었는데, 내가 ‘잠깐만 기다려. 내가 돌아올 때까지 아무것도 하지 마’라고 말한 적도 있다”고 회고했다.
탈출 이후에도 선수들의 싸움은 끝나지 않았다. 그들은 2022년 국제크리켓위원회(ICC)에 “우리의 계약은 어떻게 되나. 여자 크리켓팀 운영을 위해 아프간크리켓위원회(ACB)에 지원된 자금은 어디로 갔는가” 등을 문의했다. ICC는 “계약 문제는 ACB의 소관”이라는 원론적 답변만 내놓았다. 선수들은 지난해 6월 다시 한 번 ICC에 국제 난민 팀 결성을 요청하는 서한을 보냈지만 답변은 없었다. 아미리는 “ICC가 평등을 외치면서도 아프간 여자 선수들에게는 침묵한다”며 “남자팀은 계속 지원을 받으면서, 우리는 아무런 보호도 받지 못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탈출후 3년 반이 흐른 지난달 그들은 호주 멜버른에서 ‘아프가니스탄 여자 XI’라는 이름으로 첫 공식 경기를 치렀다. 경기에서 패했지만 경기를 치른 것 자체가 큰 의미를 가졌다. 이들은 자신들만의 엠블럼을 제작해 유니폼에 새겼다. 호주와 아프가니스탄의 국화를 크리켓공에 감싸는 디자인이었다. 경기를 마친 후 주장 나히다 사판은 “우리는 한 경기만 뛰고 끝내고 싶지 않다”며 “더 많은 경기를 치르고, 우리의 꿈을 이루고 싶다”고 말했다.
현재 팀은 공식적인 지원이 없어 자금난에 시달리고 있다. 이를 돕기 위한 온라인 모금 캠페인이 시작됐고 영국의 매릴본 크리켓 클럽(MCC) 재단도 글로벌 난민 크리켓 지원 프로그램을 통해 이들을 돕기로 했다. 이들은 “결코 포기하지 않겠다. 우리는 침묵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