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의점 3곳 거뜬히 이긴 작은 슈퍼
젊은 주인의 살뜰한 센스가 돋보여
노부부 세탁소는 복고풍 감성 물씬
공통점은 사람의 온기 전하는 매력
나는 구도심의 주택을 임대해 4년째 살고 있다. 애초에는 오피스텔이나 소형 아파트를 구해볼 생각이었다. 우연히 고등학생 때 자취하던 골목에 갔다가 향수에 붙들렸다고 할까, 이 집을 얻게 되었다. 40년 전 내가 지내던 자취방이 그때 창문 그대로 남아 있고, 나는 가끔 그 창문을 보러 간다. 1970년대나 1980년대에 지은 단층 혹은 2층 단독주택이 즐비한 동네다.
근처에는 대형마트가 없다. 자연히 골목 여기저기 숨은 가게들을 이용하게 된다. 단골 슈퍼와 세탁소가 생겼다. 물론 골목에는 없는 가게가 많다. 온라인으로 구매하면 되니 생활하는 데 딱히 불편은 없다. 올해 들어 문 닫는 가게들이 부쩍 눈에 띈다. 인근 대학가도 마찬가지다. 오랫동안 버티던 가게들이 불황기를 넘지 못한 듯하다.

1990년대 대형마트들이 생기면서 ‘골목상권’이라는 용어가 생긴 것으로 기억한다. 대형마트 입점은 약탈적으로 골목상권을 붕괴시켰다. 최근 30년 동안 우리의 소비 환경은 엄청난 변화를 겪었다. 온라인 커머스가 보편화하면서 대형마트들도 버티지 못하고 하나둘씩 폐점하고 있다.
이런 변화의 와중에 우리 동네 슈퍼와 세탁소가 버텨낸 게 신기하다. 두 가게 나름의 비결이 있는 듯하다. 동네 슈퍼는 젊은 사내가 주인이다. 주변에 편의점이 세 군데나 있지만 이 슈퍼가 가장 잘된다. 여느 편의점만 한 점포에 식료품, 생활용품, 채소와 과일, 정육 등 웬만한 구색은 모두 갖추고 있다. 가게 주인은 동네 사람들이 찾는 물건은 두루 갖추려고 한다. 심지어 계란과 고구마를 굽는 기계도 가게 입구에 설치했다.
동네에 외국인 노동자와 유학생이 늘면서 할랄 식품(Halal Food)들이 가게 매대에 놓이기 시작했다. ‘논’이라는 빵부터 양고기 통조림, 치즈, 향신료 등 낯선 유목민 식재료들이다. 나는 빵과 양고기 통조림을 가끔 사다가 먹는다. 외국인 손님들과 앞서거니 뒤서거니 섞여서 장을 본다.
주인 사내는 성실하고 활력이 넘친다. 가게에 들면 식재료를 소분하여 포장하거나 계산대에서 동네 할머니들을 응대하고 있는 그를 볼 수 있다. 그는 비상한 기억력도 갖고 있다. 구매자에게 포인트를 적립해 주는데 그는 내 전화번호 뒷자리를 외고 있다. 별것 아닌 것 같지만 단골 대접을 받는 듯해 기쁘다.
학생들이 체육대회를 하는 날이었다. 나는 학생들에게 수박을 한 통 전하고 싶었는데 수박을 먹자면 칼도 필요했다. 수박과 함께 과도를 계산대에 올렸다. 주인 사내는 사정을 눈치채고 자신이 수박을 시원하게 냉장해다가 직접 운동장으로 배달해 주겠노라고 했다. 더불어 가게에 있는 칼을 가져가겠다며 계산대에 올린 과도도 물렸다. 입소문이 나서 학생들이 단체로 구매할 물건이 생기면 이 가게를 찾는다.
그에 반해 세탁소는 복고풍 감성을 불러일으킨다. 문 닫은 이발소와 문구점 옆에서 노부부가 세탁소를 하고 있다. 할아버지는 다림질하고 할머니는 미싱을 두고 옷을 수선한다. 전면창에는 코팅지로 눌러 붙인 단풍이 색이 바랜 채 가득 붙어 있다. 처음에는 미덥지 않았다. 세탁비를 현금으로만 받는 데다가 꿈지럭거리며 세탁물을 찾는 손길이 답답했다. 그러나 이 세탁소에는 요새는 경험하기 힘든 정감이 있다. 이름도 묻지 않고 세탁물을 받는다. 공책에다가 세탁물을 적는데 내 이름을 뭐라고 적는지 모르겠다. 여러 날 세탁물을 찾지 않으면 손수 집을 찾아와 두고 간다. 세탁비를 재촉하지도 않는다. 바지 주름 한 군데가 잘 펴지지 않는다고 얘기해 주고, 얼룩은 어떻게 지웠다고 알려준다. 나는 세탁물을 찾으러 갈 때면 부모님 용돈을 준비하듯 지폐를 준비한다.
두 가게가 골목에서 살아남는 비결이라고 했지만 위치나 설비, 편리성만은 아닌 듯싶다. 예나 지금이나 사람을 느낄 수 있는 가게가 좋은 가게다.
전성태 소설가 국립순천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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