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대 노모는 차를 타고 시내를 오갈 때마다 유난히 거리 풍경에 관심이 많다. 당신의 과거 기억 속 거리와 비교하는 재미가 있나 보다. 뭐, 윤수일의 ‘아파트’와 로제의 ‘아파트’를 다 아는 사람들만의 유희랄까. 석가모니 탄신일에 알록달록한 연등이 하늘을 가로지르면 “꼭 크리스마스 트리 속에 들어온 것 같다!”며 감동하기도 한다. “엄마, 부처님 생일 축하하려고 단 장식인데 예수님을 먼저 떠올리면 두 분 다 서운하시겠어.” “거리 풍경이 이렇게 예뻐지고 사람들이 좋아하는 걸 보면 정작 두 분은 그런 거 신경 안 쓰실 걸.”
탄핵 정국, 설 인사로 현수막 난립
‘환경 쓰레기’인걸 정치인만 몰라
그런 노모가 제일 싫어하는 거리 설치물이 정치인들이 걸어놓은 현수막이다. “아유, 지저분해. 뭐 대단한 내용도 아니구만. 그리고 꼭 저렇게 자기 얼굴을 넣어야 한다니. 뭐 잘 생긴 얼굴이라고.”
예쁘지도 않고, 흥미롭거나 중요한 내용도 아니고, 무엇보다 시선을 어지럽히는 현수막은 노모뿐 아니라 모든 이들이 생각하는 거리의 흉물이다. 2022년 12월 11일부터 개정된 옥외광고물법에 따르면 통상적인 정당 활동 범위의 정당 정책이나 정치적 현안에 대해서는 별도의 신고·허가·금지 등 제한 없이 현수막을 설치할 수 있다. ‘교통안전과 이용자의 통행 안전을 해칠 우려가 있는 위치에는 설치 금지’라는 조항이 있지만 과연 그럴까. 운전자는 기본적으로 주변 건물이나 간판에 의지해 목적지를 확인하기 마련인데 이 어지러운 정치 현수막들이 시야를 가리니 안전을 해칠 우려가 분명 있다.
무엇보다 기후위기가 심각한 지금, 어쩌자고 정치인들은 저 많은 현수막을 막무가내로 쏟아내는 걸까. 현수막 제작에 사용된 천은 소각되고 매립되는 환경 쓰레기일 뿐이다. 환경부와 행정안전부가 폐현수막 재활용 및 친환경 현수막 제작을 유도하고 있지만 실효성은 거의 없다.
환경단체들은 “재활용을 잘 하기보다 쓰레기 자체를 줄여야 한다”고 말한다. 버려지는 트럭 방수포를 재활용해 개성 있는 가방을 만들고 있는 스위스의 유명 리사이클 브랜드 프라이탁은 2019년 “가방 새로 사지 말고 교환하자”며 온라인 가방 교환 플랫폼 ‘S.W.A.P(Shopping Without Any Payment)’를 시작했다. 유명한 데이트 앱 틴더를 참고해 만든 이 시스템은 프라이탁 가방을 가진 사람이 교환하고 싶은 가방 사진을 업로드한 후, 다른 유저들의 가방을 보며 마음에 드는 제품을 선택하도록 한다. 매칭이 성사되면 서로 가방을 교환할 수 있다. 젊은 층에서 인기를 끌고 있는 중고마켓들의 목적도 우선은 물건 함부로 버리지 말고 서로 필요한 것을 바꿔 쓰자는 것이다.
그런데 유독 정치인들의 세계에선 이 단순한 제언이 통하질 않는다. 한국처럼 스마트폰 보급률이 높은 나라에서 굳이 현수막으로 홍보할 필요가 있을까.
인간의 활동에 의한 온실가스 배출을 최대한 줄이고, 남은 온실가스는 산림 조성 등으로 흡수 또는 제거해서 실질적인 배출량이 0이 되는 개념. 즉, 배출되는 탄소와 흡수되는 탄소량을 같게 해 탄소 순배출이 0(제로)이 되게 하는 것을 탄소 중립(넷-제로·Net-Zero)이라고 부른다. 우리나라는 2050년까지 탄소중립을 이루는 게 목표다.
그런데 2050년이 지금의 정치인들에게는 전혀 중요치 않은 미래다. 그때까지 정치를 할지 아무도 장담할 수 없으니까. 물론 나라의 25년 후까지 미래 비전을 내다보는 정치인도 없다.
탄핵 정국으로 현수막이 마구잡이로 증식하고 있는데, 이번 주에는 설 인사 현수막까지 걸렸다. 행안부의 ‘정당 현수막 설치·관리 가이드라인’을 보니 ‘정당이 명절 인사, 수능 응원 등 의례적인 내용으로 설치하는 현수막은 통상적인 정당활동에 포함됨’이란다. 정치인들에게서 이런 응원이나 인사를 받고 싶은 국민이 과연 몇이나 될까. 나라꼴을 이따위로 만들어놓고, 환경 쓰레기를 주기적으로 생산하면서, 새해 복을 많이 받으라고? 어이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