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을 피우는 고목 [조남대의 은퇴일기(65)]

2025-01-28

산길을 걷는다. 한쪽이 썩어 가는데도 자신을 단단히 다져 새싹을 틔우려는 고목을 만날 때면 그 의지에 절로 탄성이 터진다. 주변에서 시간의 무게를 초월한 채 삶을 꽃피우려는 분들을 보면 고목과 별반 다르지 않아 절로 고개가 숙여진다. 그런 모습에서 또 다른 희망과 도전정신을 배운다.

얼마 전 93세의 나이로 국내 최고령 영문학 박사 도전에 나서 이제 마지막 학기를 보내고 있다는 뉴스를 보았다. 이름만 들으면 금방 알 수 있는 전직 정치인 권노갑 씨다. ‘늦었다고 생각할 때가 가장 빠를 때다.’라는 말은 흔히 듣지만 이를 몸소 실천하는 사람은 드물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삶으로 증명하고 있으며, 많은 이들에게 놀라움과 감동을 주었다. “죽을 때까지 공부할래요. 끝이 아니에요.”라는 말은 꼭 해내고야 말겠다는 의지가 넘쳐 흐른다. 하루하루를 뚜렷한 목표 없이 지내는 나 자신을 되돌아보게 된다. 성당에서 맡은 봉사직책도 이제는 칠순이 넘어 귀찮다며 내려놓으려는 마음가짐이 한없이 부끄러워진다.

그는 고령에도 불구하고 원서를 읽고 논문을 쓰며 학문적 열정으로 가득 차 있다. “도전이 없다면 삶은 멈춰버린다. 나이가 더는 한계가 아니다”라고 말한다. 또 박사과정 공부를 하며 ‘챗GPT'를 배워 활용함으로써 큰 도움이 된다고 한다. 학문에 대한 열정과 자신을 끊임없이 변화시키려는 모습은 진정한 도전의 가치를 일깨운다. 흔히 노년은 배우는 것을 멈추고 성취의 여운 속에서 안식을 찾는 시기라 여겨지곤 하는데 이렇게 생각하는 분들에게는 큰 충격이 아닐 수 없을 것이다. 나 자신도 컴퓨터나 핸드폰을 하다가 잘 모르는 것이 있으면 자식들에게 물어 쉽게 해결해 오곤 했다. 요즈음 이 정도는 주민센터나 복지관에 가면 얼마든지 배울 수 있다. 게으르고 배우려는 의지 부족으로 자식 눈치 보며 아쉬운 부탁을 하는 자신이 측은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한때 ‘6공의 황태자’로 불렸을 정도로 화려한 정치인의 삶을 살았던 박철언 전 의원은 이제 시인이라는 새로운 이름으로 불린다. 그는 몇 해 전 늦은 나이에 등단했고, 최근에 윤동주문학상을 받으며 또 한 번 언론의 주목을 받고 있다. 수상할 때 “늦게 피어난 꽃이 더 오래 향기를 간직합니다”라는 소감을 전했다고 한다. 이는 시뿐만 아니라 그의 삶을 관통하는 사실이 아닐까. 그의 시에는 인간 존재에 대한 성찰과 노년에만 느낄 수 있는 감정들이 녹아 있다고 한다. 나도 오랜 공직 생활을 마치고 수필이라는 새로운 세상에서 제2의 인생을 살고 있다. 공직이라는 복잡한 세계의 짐을 벗어나 문학의 언어로 자신을 표현하기 시작한 것은 단순한 변신이 아니라 삶의 또 다른 가능성을 발견한 과정이 아닐까.

정치인의 궤적을 뒤로 하고 시라는 전혀 다른 분야에서 자신을 표현하기 시작한 그는 시를 통해 삶과 시간의 깊이를 담아낸다. 이미 영랑문학상과 김소월문학상을 받는 등 팔순이 넘은 노년에도 창조와 예술이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내가 활동하는 문인단체도 칠순은 젊은이고 팔십을 넘어야 원숙미를 보여줄 수 있을 정도다. 그래야만 삶의 깊이가 묻어나고, 오래도록 마음속에 쌓아 두었던 이야기가 강물처럼 흘러간다. 늦게 피어난 꽃이 향기를 오래 간직한다는 말처럼 독자들에게 오래도록 울림을 줄 수 있기를 기대해본다.

105세라는 숫자는 대부분 사람에게 인생의 정점이 아니라 종말이 멀지 않았다는 것을 연상시킨다. 너무나 잘 알다시피 김형석 교수는 이를 완전히 뒤집는다. 그는 지금도 강연장에서 지친 영혼들에 깨달음과 위로를 전한다. 한 강연에서 말했다. “삶이란 주어진 시간을 어떻게 쓰느냐에 따라 그 의미가 결정된다.”라고, 이는 그의 철학이자 삶의 방식이다. 강단에 선 모습은 그 자체로 역설적이다. 육신은 세월의 흔적을 지니고 있지만, 그의 정신은 청춘처럼 빛난다. ‘사무엘 울만’도 “청춘이란 장밋빛 볼, 붉은 입술이 아니라, 풍부한 상상력과 왕성한 의지력 같은 마음가짐을 뜻한다”라고 노래하였다.

백 년의 시간을 살아온 고령의 철학자가 지금까지 쉼 없이 달려왔지만, 아직도 지치지 않고 우리에게 메시지를 전하고 있다. 이는 삶에 대한 예찬이자, 시간 앞에 흔들리지 않는 굳건한 의지의 표본이 아닐까. 김 교수는 인생에서 가장 좋은 나이가 60세에서 75세로 ‘계란 노른자위 나이’라고 하였다. 그에 비하면 나는 아직도 살아갈 날이 삼십 년이나 남았다. 이제 노른자위 나이인데 할 만큼 했으니 여기서 안식을 찾으려고 꾸물거릴 때가 아니지 않겠는가. 그러다 만약 105세가 된다면 땅을 치며 후회하지 않을까. 사는 날까지 꾸준히 증진하며 도전하는 것만이 젊음을 유지하는 비결이지 싶다.

정신은 세월에 지지 않고 발맞추어 가고 있지만, 육신은 한 단계씩 내려가고 있는 것을 부인할 수 없지 않은가. 고목임에도 봄이 되면 싹을 틔우고 꽃을 피우듯이 이분들은 나이와 상관없이 끊임없이 새로움을 향해 나아가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우리의 삶에서 중요한 것은 ‘나이’가 아니라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가’라는 생의 과정이 아닐는지. 요즈음 함께 활동하는 수필과 사진동호인들은 대부분 고령임에도 열정을 다하고 있다. 인생은 결코 늦는 법은 없으니 고목처럼 견뎌 봄의 결실을 보고자 한다.

조남대 작가ndcho55@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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