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자(君子)의 현대어는 리더가 적합하다

2024-12-17

작년 가을 『단 한 권으로 읽는 논어+역경』(통나무)을 소개할 때 “공자는 ‘중국 사람’이 아니다. 공구(孔丘, BC551~479)는 춘추시대 한 제후국인 노(魯)나라에서 태어나 예술, 교육, 문화, 정치혁명을 역행(力行)했다. 그때는 ‘중국’이라는 실체가 존재하지 않았다.

노나라는 산동의 조그만 지역을 차지하고 있었으며 우리 민족의 고대사도 그 지역에 영향을 주는 거대 제국의 모습을 지니고 있었다”는 저자 도올 김용옥 선생의 말을 인용하면서 “『논어』를 우리와 먼 나라, 먼 조상의 낯선 가르침으로 오해하지 말자”고 했다.

이때 도올은 ‘『논어』는 우리 삶의 원형’이라 했는데 이는 ‘한국인의 피와 살에 흐르는 세계관과 논어가 불가분의 관계일 수밖에 없다’는 뜻으로 읽혔다.

다만, 현자들의 칭송이 자자한 만큼 『논어』가 훌륭한 고전임은 알겠지만 대부분 ‘공자 왈, 군자는…’으로 시작하는 문장이 부담스러워 읽기를 멀리하는 탓도 있을 것 같다. 군자(君子)의 군이 ‘임금’이라서 ‘군자’의 개념을 매우 높게 매기다 보니 ‘내가 무슨 군자까지…’라는 생각이 먼저 들기 때문이다.

국어사전의 ‘군자: 학식이 높고 행실이 어진 사람, 마음이 착하고 무던한 사람, 높은 벼슬자리에 있는 사람’에 더해 ‘성인군자, 도덕군자’란 호칭 역시 ‘일반인, 보통 사람’과는 거리가 멀다. 그 군자를 보통 사람과 가까운 사람으로 인식한다면 『논어』를 정독하는 독자가 훨씬 많지 않을까?

때마침 인문학자 김경집 대표 역시 오래전부터 그것에 대한 문제의식을 느꼈었는지 『소인을 위한 논어, 군자의 옷을 벗다』라는 신간을 들고 우리 곁으로 찾아왔다. ‘군자’를 평범한 소시민, 보통 사람의 지위로 끌어내려 새롭게 『논어』를 읽었다. 『엄마 인문학』 『인문학은 밥이다』 『생각의 융합』 등 다수의 인문학서를 낸 저자는 가톨릭 대학 인문학 교수였다.

그는 서른 살 무렵 ‘25년 배우고, 25년 가르치고, 25년 마음껏 책 읽고 글 쓰며 문화운동에 뜻을 두고 살겠다’고 다짐했던 대로 교수로서 만 25년 되던 해 대학 강단을 떠나 저술에만 몰두하고 있는 철학자다.

같은 이유로 필자 역시 오래전부터 군자를 대체할 현대어 중 적절한 호칭은 무엇일까 생각했는데 『소인을 위한 논어, 군자의 옷을 벗다』를 읽다 보니 ‘군자=리더(지도자)’가 적합하겠다는 생각에 이르렀다.

리더(Leader)는 이름이 널리 알려진 정치인이나 고위 공직자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산업, 경제, 교육, 민생, 문화, 예술, 체육 등 사회 각계각층에서 중추적 역할을 하는 ‘CEO, 국장, 교장, 소장, 명사, 감독’ 등 지도자들인데 공자께서 말하는 군자란 바로 이 지위에 있는 사람이라고 봤을 때 『논어』가 21세기에도 여전히 ‘삶의 원형’으로 유효하지 않을까!

“예순이 넘으니 군자의 고고하고 품격 있는 삶이라는 게 관념에 그치거나 이념에 머물기 쉽다는 것을 깨닫는다. 물론 내가 그렇게 느끼는 건 나의 삶과 인격이 군자 근처에도 가지 못하는 까닭이겠지만 이제는 그런 군자에게 별로 끌리지 않는다. 그래서 오히려 소인이 당당하게 자신의 권리와 능력을 발현할 수 있도록 그의 족쇄를 풀어주는 게 더 낫겠다 싶었다. 물론 나도 소인에 속하기 때문에…”라는 저자의 집필 의도가 바로 그 말을 하고 있다.

『논어』가 요구하는 21세기 대한민국의 리더, 지도자란 어떤 사람이어야 할까? 리더의 덕목을 한마디, 한 가지로 정의하기 어렵겠지만 ‘사익을 추구하되 공익에 긴장하는 사람’(『나는 시민인가』 사회학자 송호근, 문학동네)이어야 하는 것이 최소한의 요건이 아닐까 생각한다. 리더는 그래야 하는 사람이니까.

▶본 기사는 입법국정전문지 더리더(the Leader) 12월호에 실린 기사입니다.

Menu

Kollo 를 통해 내 지역 속보, 범죄 뉴스, 비즈니스 뉴스, 스포츠 업데이트 및 한국 헤드라인을 휴대폰으로 직접 확인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