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80년대 민족해방운동의 역사를 그린 대형 걸개그림 제작에 참여했다가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유죄 판결을 받은 전승일 감독(60)에 대해 법원이 재심 개시를 결정하자 검찰이 즉시항고 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6일 법조계에 따르면 서울중앙지법 형사항소5-2부(재판장 김용중)는 지난 1일 전 감독 재심 개시 결정에 대한 검찰의 즉시항고를 기각했다. 지난해 8월 1심에서 전 감독의 재심 개시 청구를 인용한 지 약 8개월 만이다.
전 감독은 대학 시절 1989년 ‘전국대학미술운동연합’에서 활동하며 대형 걸개그림 ‘민족해방운동사’ 제작에 참여했다. ‘민족해방운동사’는 총 77m 길이로, 한국 근현대사를 동학농민운동, 일제강점기, 5·18 민주화운동 등 민족해방운동 중심으로 그려낸 작품이었다. 당시 공안당국은 이 그림이 북한에 동조하는 내용이 담긴 ‘이적표현물’이라며 전 감독 등을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기소했다. 전 감독은 1991년 징역 1년 및 자격정지 1년,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았다. 이후 그림은 민중미술로 재평가돼 1994년 국립현대미술관에 전시됐고, 2007년 전 감독은 민주화보상법상 ‘민주화운동 관련자’로 인정받았다. 그러나 전 감독이 국가보안법을 위반했다는 죄명은 지워지지 않았다.
지난해 전 감독은 법원에 재심 개시를 청구했다. 전 감독은 수사관들에 의해 강제연행된 후 동의 없이 구금이 연장되고 가혹행위가 이어졌다며 “위법 구금”이라고 주장했다. 1심에서 직접 법정에 나온 전 감독은 대낮 길거리에서 수사관들에게 구타 당하며 국가안전기획부에 끌려가던 당시 상황을 명료하게 증언했다. 재판부는 “수사의 적법성에 강한 의심을 불러일으키는 사정”이 있다며 재심 개시를 결정했다.
검찰은 1심 결정에 불복해 즉시 항고했다. 검찰은 임의동행의 위법성이 입증되지 않았으며, 구속영장이 발부된 이후 구금에 대해선 불법이라 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항소심도 전 감독에 대한 재심 개시 사유를 인정했다. 재판부는 “전 감독에 대한 임의동행이 적법했다 하더라도 불법구금이 있었던 것은 사실”이라고 판단했다. 수사관들이 전 감독을 임의동행한 것은 1989년 8월24일이었고, 구속영장은 같은 달 26일에 집행됐다. 영장이 발부되기 전이라면 전 감독은 귀가했어야 하지만, 재판부는 이를 입증할 자료가 없다고 봤다. 또 “전 감독이 자유로운 의사에 따라 안기부에서 3일간 머물러 있었다고 볼 수 없다”고 밝혔다.
전 감독은 기자와 통화하며 “검찰의 즉시항고로 1심의 재심 청구 인용 결정이 무효가 되면서 막연하게 결과를 기다리기만 해왔다”며 “검찰이 다시 불복해 (사건이) 대법원으로 간다면 정의에 기반한 절차라고는 절대 할 수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