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전 비서를 성폭행한 혐의로 경찰 조사를 받던 장제원 전 의원이 지난달 31일 사망했다. 장 전 의원은 혐의를 부인하다가 피해자가 휴대전화로 촬영한 결정적 증거가 보도된 날 스스로 생을 마감했다. 유서엔 “상처를 받았던 분들에게 용서를 구한다”고 적었다. 피해자에게 직접 건네는 사과는 없었다.
비겁한 선택이다. 3선 국회의원이자 윤석열 전 대통령의 핵심 측근으로 분류됐을 정도로 권력의 정점에 서 있었던 공직자가 진실을 외면했다. 10년 전 당했던 성폭력을 최근 털어놓기까지 피해자가 감내했을 고통은 뒷전이었다. 끝까지 범행을 인정하지 않으면서 피해자의 증언을 거짓말로 모는 2차 가해까지 저질렀다. 그의 죽음으로 수사가 종결될 가능성이 커졌기에 피해자가 명예를 회복할 기회도 사라졌다.

정치권의 반응도 상식 밖이다. 애도는 자유라지만 피해자를 위한 존중은 찾아보기 어렵다. “죽음으로 업보를 감당했다”(하태경 전 의원)는 말은 온당치 않다. 수사에서 도피한 피의자가 무슨 속죄를 했단 말인가. “성폭행 사건과 관련해서 (장 전 의원이 겪은 일이) 정말 참기 어려운 고통이었을지도 모른다”(김성태 전 의원)는 말은 언어도단이다.
나종호 미국 예일대 정신의학과 교수는 5년 전 비서를 성추행한 혐의로 고소 당하자 자살한 박원순 전 서울시장 사망 사건 때 이렇게 썼다. “자살이 명예로운 죽음으로 포장되고 모든 것의 면죄부인 것처럼 여겨지는 분위기는 지양해야만 한다.” 나 교수는 장 전 의원의 사망 소식이 알려진 날 페이스북에 이 글을 다시 공유했다.
박 전 시장 사건 당시 취재했던 한 행사가 떠오른다. 그의 성폭력 가해 사실이 알려진 뒤 재조명된 책이 있었다. 안희정 전 충남지사 성폭력 사건의 피해자 김지은 씨가 사건의 전말을 기록한 『김지은입니다』였다. 권력형 성폭력을 규탄하는 시민들이 거리에 모여 그 책을 함께 소리 내 읽는 독서회를 열었다.
한 참가자는 ‘살아서 증명할 것이다’라는 제목의 에필로그를 읽으며 몇 번이고 눈물을 삼켰다. 그는 “성폭력 피해자는 평범한 일상을 이어가는 데도 용기가 필요하다”며 “(박 전 시장 사건) 피해자가 살아 있어 줘서 고맙다”고 말했다. 장 전 의원 사건의 피해자도 살아남아 진실을 알리기까지 큰 용기가 필요했을 것이다. 이번에도 피해자는 살아서 증명하려 했고, 가해자는 도망쳤다.
대통령 탄핵과 조기 대선에 이목이 쏠리면서 이번 사건을 통해 우리 사회가 돌아보고 고쳐야 할 부조리를 지나치진 않을까 걱정이다. 다시는 권력형 성폭력 사건이 벌어지지 않길 바란다. 그럼에도 또 다른 가해자가 나온다면 기억하길 바란다. 피해자에 대한 죄의식과 공인으로서 양심이 있다면, 살아서 감당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