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배우 김수현이 고 김새론과 고인이 15세였을 때부터 교제했다는 의혹에 휩싸였다. 김수현은 교제를 한 적이 없다는 기존 입장을 번복해 “고인이 성인이 된 이후 교제했다”며 의혹을 부인하고 있다. 이 사건의 사실관계에 대한 공방과는 별개로, 성인이 아동·청소년과 맺는 관계를 ‘일반적인 애정 관계’라고 봐도 될까.
의혹이 제기된 이후 기사 댓글이나 온라인 커뮤니티 게시글 등에서는 ‘청소년과 성인이 실제로 성애적 관계를 맺었다고 해도 문제삼을 필요는 없다’는 반응이 나오기도 했다. 문화평론가 김갑수씨가 유튜브 방송에서 “미성년자랑 연애했다는 게 무슨 거대한 범죄처럼 난리가 났다”, “사람이 사귀는데 나이 차이가 크게 날 수도 있고, 여자 나이가 많을 수도 있지 않냐. 그들이 어린 나이에 사귀었나 보다” 등의 발언을 한 것이 대표적이다. 일각에서는 아동·청소년과 성인의 만남을 금기시하는 것이 아동·청소년의 ‘연애할 자유’를 무시하는 것 아니냐고 반문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런 인식은 아동·청소년과 성인의 권력 차이를 가리고 실제로 발생하는 ‘그루밍’(grooming·길들이기) 성범죄 위험을 간과한다. 아동 대상 성범죄를 처벌하는 법이 강화되는 추세이기는 하지만, 그루밍에 취약한 아동을 발견하고 보호하기 위해선 인식 개선 역시 동반돼야 한다고 전문가들은 지적한다.
한국을 포함한 웬만한 국가에서 일정 연령에 도달하지 않은 사람은 투표 및 선거 입후보, 군 입대, 혼인, 주류 및 담배 구입, 운전 등의 행위에 제한을 받는다. 이는 미성년자의 자유와 권리를 제한하는 측면도 있지만 크게 보면 아동·청소년 보호에 방점이 찍혀 있다. 사회가 연령 기준을 설정함으로써 아직 스스로 판단하고 자신의 행위에 책임을 질 능력이 없는 이들을 성인과 다르게 취급해 ‘보호’하는 것이다.
반면 성인과 아동·청소년 교제에 관해선 관대한 인식이 흔하다. 아동·청소년에게 술·담배를 권하는 건 지탄하면서도 성인과의 연애는 ‘서로 좋아서 만난다는데 뭐가 문제냐’는 반응이 나온다.

성인이 아동·청소년과 교제하는 것이 부적절하다는 논의는 ‘아동·청소년의 연애나 성적인 행위 자체를 금지하자’는 주장과는 거리가 있다. 그보다는 관계를 해석할 때 어른과 아동 사이 엄연히 존재하는 ‘위계’와 ‘격차’를 고려해야 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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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관계에 성적인 행위가 수반될 경우 아동·청소년이 성인에게 끌려가기 쉽다는 점이 문제다. 이현숙 탁틴내일 아동·청소년 성폭력상담소 대표는 “한국에는 ‘나이에 비해 까졌다’, ‘어른을 꼬셨다’, ‘본인도 좋아한다’ 등 청소년에게 책임을 묻는 문화가 존재했다”며 “(성적인 행위에 관한) 동의라고 할 때 그 ‘동의’가 어떤 의미인지, 내가 그런 행동을 했을 때 사회적 반응이 어떨지를 이해하는 판단 능력이 있어야 하는데 아동·청소년의 경우에는 아직 그런 것을 다 판단하고 책임질 수 있을 만큼 성장하지 않았다”고 강조했다.
이어 이 대표는 “성적인 경험이 많은 어른에 의해서 아동이 길들여지는 것과 또래 간의 성적인 접촉은 아동 발달에 미치는 영향이 상당히 다르다. (전자는) 성에 의존하게 될 가능성도 크고, 피해라는 것을 인식하지 못하기 때문에 아동 발달에 심각한 영향을 끼친다”고 설명했다.
성인과 아동·청소년 사이 존재하는 권력 차이를 대표적으로 드러내는 것이 ‘그루밍’이다. 연구나 관련 기관에서 내린 정의를 종합하면, 일반적으로 그루밍은 아동 성착취를 목적으로 신뢰와 유대감을 쌓는 행위를 뜻한다.
예를 들어 국제실종아동센터(ICMEC)는 그루밍을 ‘아동이 성적인 행위를 하게끔 준비하는 목적으로 아동이나 아동의 가족에게 접근하고 영향력을 행사하는 행위’로 규정했다. 국제 아동 성착취 근절 단체 엑팟(ECPAT)은 그루밍을 ‘행위자가 자신과의 성적인 접촉을 용이하게 하기 위해 아동과 관계를 쌓는 과정’이라고 봤다. 즉 그루밍은 성인이 성적인 목적을 품고 아동에게 접근해 신뢰와 호감을 쌓아 범죄를 더 쉽게 만드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범죄에 앞서 친밀한 감정을 심어줘야 하기 때문에 그루밍은 일회성 만남에 그치지 않고 비교적 장기간 이어진다는 특징이 있다. 가해자가 성착취란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피해자를 물색하고, 접근하고, 통제하는 일련의 과정이 그루밍을 구성한다.
탁틴내일은 2017년 자료집 ‘아동·청소년 성범죄 속 그루밍, 어떻게 볼 것인가?’에서 그루밍을 6개 세부 단계로 구분했다.

이러한 단계는 분절된 것이 아니고 동시에 중첩될 수 있다. 또한 가해자가 한 행위의 단면만 놓고 봐서는 그루밍이 아닌 것처럼 판단할 위험이 존재한다. 예를 들어 진로 고민을 들어주고, 선물을 전달하고, 대피처를 제공하는 것은 일반적으로 선한 행위이기 때문에 피해자나 제3자가 가해자의 범죄 의도를 짐작하기 어렵게 한다.
가해자가 대외적으로 ‘착한 아저씨’, ‘좋은 선생님’ 정도로 알려져 있다면 더욱 그렇다. 2020년 논문 ‘그루밍 성범죄의 특성 및 처벌’을 보면, 오프라인 그루밍 가해자의 특징으로 ‘친근하고 지역사회 내에서 존경받는 위치에 있는 사람으로 피해자들이 마주치기 쉬운 환경(학교, 학원, 방과후 교사, 종교집단)에 있었으며 이 때문에 아이들과 교류할 때 의심을 피할 수 있었다’는 점이 지목된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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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 그루밍 범죄 사례를 다룬 논문 ‘아동·청소년 대상 성범죄 그루밍 판례 분석’(2020)에는 부모의 관리가 소홀하거나 장애, 정서적 결핍, 가정폭력 등을 겪던 피해자가 가해자의 그루밍 목표물이 되는 과정이 드러나 있다. 판례 7건에서 피해자는 모두 10대 여성, 가해자는 성인 남성이었으며 가해자는 아버지 지인, 친구의 아버지, 친부, 인터넷으로 알게 된 남성, 학교 선생님 등이었다.
피해자의 신뢰를 얻고 나서 성착취를 가하는 그루밍 범죄의 특성상 판결문 속 피해자들은 대부분 피해 당시 자신의 상황을 인지하지 못했다. 따라서 외부에 도움을 청하지 못했으며, 고립과 통제 탓에 몇년 뒤에야 신고 혹은 제3자의 발견으로 이어졌다. 가해가 한 차례에 그친 경우는 없었다. 한 피해자는 “당시 자신은 성관계가 무엇인지도 몰랐는데, 지금 생각해 보니 그때가 첫 성관계였다”고 했으며, 또 다른 피해자는 “피고인(가해자)을 사랑하기 때문에 성폭행을 감내해야 한다고 생각했으나 혼란스러웠다”고 했다.
그루밍 성범죄에 관한 논의가 수면 위로 올라온 덕분에, 한국 법 체계는 성인과의 관계에서 아동·청소년을 보호하는 쪽으로 강화돼 왔다. 2019년 아동⋅청소년의 성보호에 관한 법률(청소년성보호법) 개정안이 시행되며 만 19세 이상의 사람이 만 13세 이상 16세 미만인 아동·청소년의 궁박한 상태를 이용해 해당 아동·청소년을 간음하거나 추행하는 경우에는 자발적 의사와 무관하게 처벌이 가능해졌다. 이어 2020년 소위 ‘N번방 사건’ 이후 미성년자 의제강간(형법 305조2항) 적용 대상 연령이 기존 ‘만 13세 미만’에서 ‘만 16세 미만’으로 확대됐다. 따라서 2025년 현행법은 성인이 만 16세 미만인 자를 간음·추행한 경우 동의 여부와 관계없이 강간·유사강간·강제추행으로 간주한다.
여기에 더해 지난 2일 국회 본회의에서 청소년성보호법 개정안이 통과되며 아동·청소년을 대상으로 한 ‘오프라인’ 그루밍을 처벌할 수 있게 됐다. 기존에는 온라인에서 아동·청소년에게 성착취를 목적으로 대화를 지속하거나 성적 행위 등으로 유인한 경우에만 처벌이 가능했으나, 이제는 온라인에서도 이런 행위를 한 경우 처벌 대상이 된다.

다만 가해자가 ‘상대가 성인이 아닌 것을 몰랐다’고 주장하면 빠져나갈 여지가 존재하고, 미성년자 의제강간 연령을 벗어났지만 성인은 아닌 만 17세 이상 아동은 여전히 범죄에서 취약한 사각지대라는 문제가 있다. 이현숙 대표는 “해외의 경우에는 그루밍 방지 조치로서 ‘보호자에게 알리지 않고 사적 만남을 하자고 제안하는 것’ 자체를 금지한다”고 전했다. 성인이 보호자에게 알리지 않고 아동의 개인정보를 요청하고, 지정된 공간이 아닌 곳에서 만나고, 차량에 동승시키는 것 등이 부적절한 행위로 간주된다는 것이다. 이 대표는 “아동에게 ‘너도 그럴 마음이 있었냐’고 묻는 것이 아니라 성적인 의도가 없었다는 것을 가해자가 입증하는 방식이 돼야 한다”고 밝혔다.
아예 미성년자 의제강간 적용 연령을 현행 ‘만 16세 미만’에서 ‘만 19세 미만’으로 상향해달라는 목소리가 꾸준히 나온다. 지난달 31일 국회전자청원에는 한 청원인이 ‘○○○ 방지법’을 제정해 달라고 청원했다. 의제강간 연령을 상향하고 처벌도 강화해달라는 취지다. 청원인 이모씨는 “대한민국 법률은 명백히 만 18세까지를 미성년자로 규정해 보호하고 있는데도 13세 이상 16세 미만의 미성년자만 보호하겠다는 의제강간죄 나이 제한 때문에 소아성애자가 법망을 피해갈 수 있게 됐다”고 청원 취지를 밝혔다.
해당 청원에는 7일 기준 5만명 이상이 동의해 소관 상임위원회 회부 기준을 넘겼다. 30일 이내로 5만명 이상의 동의를 얻은 청원은 국회 소관위원회 및 관련 위원회에 회부된다.
▼ 김서영 기자 westzero@khan.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