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석열 대통령이 12·3 비상계엄을 선포하기 위해 개최한 국무회의의 회의록은 아직 작성되지 않았다. 대통령실에서 관련 자료를 제출하지 않아서다. 11일 행정안전부 의정관실은 여전히 관련 자료를 받지 못했다고 밝혔다.
이날 헌법재판소에 따르면 윤 대통령은 비상계엄 관련 국무회의 회의록과 계엄 포고령 등의 자료도 헌법재판소에 제출하지 않았다. 제출 마감 기한은 지난달 24일까지였다.
의정관은 국무회의 간사로 국무회의에 참석해 사회를 맡고, 발언요지 등을 정리해 국무회의록을 작성한다. 의정관이 국무회의에 빠진 적은 지금껏 단 한 차례도 없었다. 개최 사실 자체를 알지 못해 참석을 못 한 그날만 예외였다.
의정관실이 국무회의록 작성을 위한 자료를 요청할 때마다 대통령실 국정과제비서관은 “자료를 확보하지 못했다”고 답변했다. 대통령실은 지난달 10일 의정관실의 자료 요청에도 “발언요지를 보유하고 있지 않다”고 답한 바 있다.
단 5분, 회의록을 남길 수 없을 정도로 졸속으로 끝난 회의를 ‘국무회의’라고 할 수 있을지부터 의문이 커지는 상황이다.
회의록을 남기지 않은 비상계엄 국무회의는 ‘대통령의 국법상 행위는 문서로써 한다’는 헌법과 ‘대통령과 대통령의 보좌·자문기관 등의 장은 대통령의 직무수행과 관련한 모든 과정과 결과가 기록물로 생산·관리되도록 해야 한다’고 규정한 대통령기록물 관리에 관한 법률에 어긋난다.
<조선왕조실록>을 남긴 한국의 기록문화 전통을 봐도 ‘중범죄’에 해당한다. 조선시대 사관은 국왕이 참여하거나 대신들이 국왕을 만나는 모든 중요한 자리에 참석해 보고 들은 내용을 기록한 사초(史草)를 남겼다. 그중 한 부를 춘추관에 보관하고, 한 부는 집에 두고 필요한대로 첨가 기록했다가 실록을 편찬할 때 제출했다.
사초는 실록 편찬을 위한 가장 중요한 자료로, 사관이 사초를 제출하지 않거나 잃어버리면 엄히 처벌했다. <태종실록19권>(1410년)에는 <태조실록> 편찬을 위해 사초를 바치게 하는 내용이 나오는데, 이때 “사초를 제출하지 않은 사람은 이전 왕조(고려)의 판결에 따라 그 자손의 관직 진출을 금지하고 은 20냥을 벌금으로 물리십시오”라는 춘추관의 언급이 등장한다.
이후 세종은 1432년 ‘금고’(禁錮·죄를 지은 사람이나 그 자손의 관직 진출을 금하는 형벌)가 너무 과하다고 하면서 ‘은 20냥을 징수하고 서용(敍用·죄를 지어 직을 박탈당한 사람을 다시 벼슬자리에 등용함)하지 않는 것’으로 정리했다. 자손의 벼슬길까진 막진 않았지만, 사초를 제출하지 않거나 잃어버린 사람은 최소 파면에 은 20냥 벌금이라는 무거운 처벌을 받은 것이다.
이 외에도 사초와 관련된 형벌은 매우 엄했다. 세종31년(1449년) 사초관리를 위한 6개항을 보면 사초를 훔친 경우 ‘제서(制書·왕의 명령을 알릴 목적으로 적은 문서)를 훔친 형률’을 적용해 참형(斬刑·목을 벰)에 처하고, 글자를 도려내거나 먹으로 지우는 등 훼손한 경우 ‘제서를 훼손한 형률’로 참하도록 했다. 이를 알고도 고발하지 않은 자는 ‘제서 훼손 형률’에서 한 등급을 낮춰 처벌했다. 사면받더라도 영구히 서용하지 않도록 했다. 실록을 보면 군신이 이런 처벌을 건의할 때마다 왕은 ‘따랐다’고 나온다.
오항녕 전주대 대학원 사학과 교수는 “사초 관리의 엄격성과 책임성의 강조는 <세조실록>을 편찬할 때 발생한 ‘민수(閔粹)의 옥사(獄事)’를 통해 알 수 있다”고 설명했다. 민수의 옥사는 세조실록을 편찬할 때 민수가 춘추관에 이미 제출한 사초를 수정하면서 시작됐다. 세조 때 대신들의 잘잘못을 많이 기록했다고 생각한 민수는 강치성을 시켜 그 사초를 몰래 꺼내 지우고 고쳤다.
<예종실록>에 따르면 민수는 사초를 수정한 죄로 장100대를 맞은 뒤 제주 관노로 내려갔고, 강치성은 사형을 당했다. 민수의 처벌이 상대적으로 가벼웠던 것은 예종이 민수가 외아들이라는 것을 배려했기 때문이다.
조선왕조가 기록물 관리를 철저히 한 이유는 역사를 현재를 돌아보는 거울로 봤기 때문이다. 오항녕 교수는 “관료제 운영의 책임성과 투명성에 대한 상식이 있었다. 국왕부터 사초를 보호하는 데 앞장섰다”면서 “역사를 기록하는 행위를 존중해 젊은 사관들에게 이런 중책을 맡겼고, 이 제도가 조선이 망할 때까지 500년을 지속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야당 ‘기록 누락’ 처벌하는 공공기록물관리법 개정안 발의
대통령기록물법에 따르면 대통령기록물을 손상·은닉·멸실 또는 유출한 자는 7년 이하의 징역 또는 2000만원 이하의 벌금에 처한다. 중대한 과실로 대통령기록물을 멸실하거나 일부 내용이 파악되지 못하도록 손상시킨 자는 1000만원 이하의 벌금에 처한다. 이미 만든 자료를 훼손하거나 숨기면 처벌하는 규정은 있지만 생산 자체를 하지 않을 때의 처벌 규정은 이렇다 할 게 없다.
이런 틈을 메우려는 입법이 진행 중이다. 모경종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지난 6일 국가 주요회의 기록물의 생산과 보존을 강화하는 ‘공공기록물 관리에 관한 법률 일부개정법률안’(공공기록물관리법)을 대표발의했다. 이른바 ‘0장짜리 국무회의록’을 막기 위한 법이다.
의원 16명이 공동제안한 이 개정안은 주요 기록물을 고의 또는 중과실로 생산하지 않은 경우 3년 이하의 징역 또는 2000만원 이하의 벌금을 부과하도록 했다. 중앙기록물관리기관의 장(국가기록원)이 국가안보 관련 중요 기록물의 경우 즉시 폐기 금지를 결정하고 통보할 수 있도록 하는 내용도 담았다.
모경종 의원은 “국가기록원이 기록이 사라질 위험을 인지해도 강제력 있는 보존조치를 취할 수 없는 것이 현실”이라며 “이번 법안을 통해 국가 중요 기록물의 생산 의무화하고 보존 체계를 강화하여 정부의 의사결정 과정의 투명성과 책임성을 높이겠다”고 밝혔다. 채현일 더불어민주당 의원도 지난 8일 국가기록원의 기록물 폐기 금지 결정·통보 의무를 강화한 공공기록물관리법 개정안을 제안했다.
김유승 정보공개센터 대표(중앙대 문헌정보학과 교수)는 “이제까지 기록물을 무단으로 폐기하고 멸실한 경우에만 처벌조항이 적용됐지, 생산하지 않은 것에 경우에 대한 처벌조항은 없었다”면서 “고의성이 농후한 경우 처벌하려는 취지에 동의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