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의 두음법칙 무시 [김태훈의 의미 또는 재미]

2025-08-21

한국어에 두음법칙(頭音法則)이라는 것이 있다. 단어 첫머리에 일부 소리가 발음되는 것을 꺼려 다른 소리로 발음하는 현상을 일컫는다. ‘일부 소리’라고 했지만 실은 ‘ㄴ’과 ‘ㄹ’ 둘이다. 한자어 ‘닉명’(匿名)을 익명, ‘년세’(年歲)를 연세, ‘뉴대’(紐帶)를 유대라고 읽거나 적는 것이 대표적이다. 마찬가지로 ‘력사’(歷史)는 역사, ‘래일’(來日)은 내일, ‘로인’(老人)은 노인으로 각각 발음하고 표기하는 것이 두음법칙에 맞는다. 일제강점기인 1933년 조선어학회가 만든 ‘한글 맞춤법 통일안’에 처음 포함된 이래 아직까지 지켜지고 있으니 제법 유서가 깊은 규칙이라고 하겠다.

그런데 두음법칙을 일반 단어가 아닌 고유 명사, 특히 사람 이름에까지 적용하는 것을 두고선 논란이 있다. 성(姓)이 라(羅)씨, 류(柳)씨, 리(李)씨인 경우 두음법칙에 따라 ‘나씨’, ‘유씨’, ‘이씨’가 되어야 한다. 조상과 부모에게 물려받은 귀중한 성을 단지 한글 표기법 때문에 변경해야 한다니, 수긍하기 힘든 일이었을 것이다. 실제로 이승만 초대 대통령(1948∼1960)은 ‘리승만’이란 표기를 고집했다. 류씨 성을 사용해 온 이들은 “유씨로 바꿔야 한다”는 정부 지침에 반발해 소송을 내기도 했다. 노무현정부 시절인 2007년 대법원은 이들의 요구를 받아들여 가족관계등록 예규를 고쳤다. ‘성씨의 한글 표기는 개인의 의사에 맡긴다’는 것이 개정 취지였다.

한국과 달리 북한은 두음법칙을 무시한다. 실은 일제강점기 조선어학회 회원들 사이에서도 두음법칙을 놓고 견해가 갈렸다. 조선어학회에서 주도적 활동을 하다가 광복 이후 북한을 선택한 리극로(1893∼1978) 같은 인물이 대표적인 두음법칙 반대론자로 꼽힌다. 오늘날 한국에선 ‘이극로’로 더 널리 알려진 학자다. 그가 1949년 조선어문연구회 위원장에 취임해 북한의 어문 정책을 총괄하며 두음법칙도 자연스럽게 폐기된 것으로 보인다. 남북한 언어 이질화의 심각성이야 어제오늘 얘기가 아니지만 일반인의 시각에선 두음법칙을 따르느냐, 그렇지 않느냐 하는 차이점이 가장 커 보인다.

20일 북한 조선중앙통신은 하루 전인 19일 김여정 노동당 부부장이 외무성 주요 국장들과 협의회를 열고 김정은 국무위원장의 대외 정책 구상을 하달했다고 보도했다. 통신에 따르면 김여정은 지난 수십년 동안의 한국 정치 흐름을 설명한 뒤 “결론을 말한다면 ‘보수’의 간판을 달든, ‘민주’의 감투를 쓰든 우리 공화국(북한)에 대한 한국의 대결 야망은 추호도 변함이 없이 대물림하여 왔다”며 “리재명(이재명)은 이러한 력사(역사)의 흐름을 바꾸어 놓을 위인이 아니다”라고 비난했다. 이재명 대통령을 우리에겐 생경한 ‘리재명’이라고 호칭한 점이 눈길을 끈다. 두음법칙을 무시하는 북한의 어문 정책이야 그렇다 쳐도 사람 이름 같은 고유 명사는 예외로 해야 하지 않을까. 하긴, 인권이란 개념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 북한에서 ‘성씨의 한글 표기는 개인의 의사에 맡긴다’는 우리 대법원 판단이 존중을 받을 가능성은 없다고 봐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김태훈 논설위원 af103@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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