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종두 울산예총 고문(시인, 소설가)의 1980년 삼청교육대 수난기(受難記)를 연재한다. 울산MBC 기자였던 최종두 고문은 1980년 경기도 포천에 있는 군부대에 끌려가 필설로 다할 수 없는 고초를 겪었다. 연재 글에는 인권을 짓밟는 ‘삼청교육’의 참상이 생생히 그려져 있고, 1970~80년대 울산의 정치, 경제, 언론, 문화계 비사(祕史)도 엿볼 수 있다. 최 고문은 “1980년대는 찬탈한 정권을 유지하기 위해 국민들에게 영혼을 뭉개버리는 무자비한 고문을 가하고, 전주 같은 목봉을 힘겹게 들게 하면서 서막을 열었다”며 “몽둥이와 총으로 지레 겁을 주며 정권을 유지할 수 있는가를 실험한 것이 제5공화국의 주구들”이라고 술회했다. <편집자 주>
그러다가 나로서도 앞이 막막하고 도저히 이번만은 담담할 수 없는 큰일을 저질러 버렸다고 생각되는 것이 있었다. 1971년 4월 27일은 제7대 대통령선거가 있었던 날이었다. 박정희 후보와 김대중 후보가 맞붙어 선거 사상 보기 드문 치열한 선거를 치렀던 것이다. 그 선거를 사실상 총괄하고 있었던 HR로서는 고향 울산에서의 투표 결과에 주야로 신경을 쓸 수밖에 없었다. 그의 주변에서도 서서히 정적들이 생기고 있는 데다가 박정희 대통령의 지근거리에서 계속 보좌하기 위해서는 선거의 승리만이 보장받는 길이 되기 때문이었다.
HR은 그 선거를 성공시켜줄 사람이 울산시장이 되어야 한다고 여기게 되었다. 똑똑하고 당찬 울산시장이 있어야겠다는 생각 때문에 전국을 대상으로 적당한 인물을 물색하게 되었는데 여기에 적임자로 뽑혀온 사람이 윤동수였다. 그는 당시 경상남도 기획관리실장으로 있었고, 마침 그의 고향도 울산이었기 때문에 금의환향이라 마다할 리 없었다. 더욱이 HR의 체면만 세워준다면 앞으로의 승진가도를 무난히 달리게 될 것이라는 꿈에 부풀어 있었으리라. 결국 그것이 그를 오버하게 만들었고, 그가 꿈꾸는 희망을 송두리째 빼앗아 가고 말았다.
그의 꿈이 빗나가게 된 이유는 그의 과욕에 의한 범법 행위가 그만 지방지인 대구매일신문의 한종오 기자에게 덜미를 잡혔기 때문이다. 한 기자는 삼성그룹의 창업주 이병철이 울산에 한국비료 공장을 지으면서 사카린을 밀수한 사실을 파헤쳐 보도함으로써 전국에 알려진 민완기자였다. 이 사건은 결국 이병철이 한국비료를 국가에 헌납함으로써 매듭지어졌다.
HR 역시 한종오 기자만은 잊지 않고 기억하고 있는 중이었다. 선거 개표 결과 예상치를 훨씬 넘게 된 투표로 박정희 후보의 표가 높게 나타나자 야당은 물론 일산 시민들마저도 예상 밖의 투표라고 입을 모았다. 선거 후의 민심은 곧 ‘표를 도둑맞았다’는 것이었고, 선거에 조작이 있었다는 여론이 들끓게 되었다. 민심은 폭발 직전에 이르고 있었다. 한종오 기자는 금권이야 필연적으로 있을 것이라는 예상을 하고 있었지만 득표에 조작이 있다는 여론에 특히 귀를 기울였다.
윤동수 시장이 부임하게 된 것은 이 선거 하나에 승부수를 걸었기 때문일 것이라고 짐작하게 되었다. 더욱이 선거가 있던 날 중앙정보부 울산 주재 요원이 장시간 시장실에서 밀담을 나누고 갔다는 사실도 포착하게 되었다. 한종오 기자는 그 두 사람이 그렇게 오랫동안 밀담을 나누었다면 필시 대화를 나누면서 메모를 남긴 흔적이라도 있을 것이다 하고 그 메모 쪽지를 찾아보아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한 기자가 여유 있게 시장실로 들어서며 “시장님! 이제 앞이 훤히 보입니다.” 했을 때, 윤 시장은 탁자 위의 종이들을 급히 치워버리는 모습을 보였다. 한 기자가 그 순간을 놓칠 리 없었다.
“그런데 시장님, 어찌 여기에 앉아 계십니까?” “왜요?” “허, 참, 부산검찰에서 울산으로 오고 있는 것을 모르십니까? 어서 어디로 피하셔서 푹 쉬도록 하세요.” “그럴까…?”
윤 시장은 부랴부랴 윗도리를 걸치면서 현관으로 뛰어갔다. 한 기자는 이때다 하고, 쓰레기통에 손을 넣어 잡히는 대로 휴지를 쥐고는 포켓에 넣고 사무실로 달려갔다. 두어 시간을 휴지를 꺼내 하나하나 살피게 되었을 때였다. 분명히 선거에 관한 찢어진 명함 쪽지를 발견하게 되었다. 그 찢어진 쪽지를 맞추어 보았더니 당장 투표수를 조작하는 내용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실로 007 작전 끝에 얻은 수확이었다. 이 내용을 전화로 송부하면서 기사를 보낸 것이 깜짝 놀랄 특종이 되고 말았다. 그런데 친구인 이 한종오 기자 때문에 내가 곤욕을 치르게 되었다.
윤동수 시장을 구속시킨 부산지검이 선거관리위원들을 조사하지 않을 리 없었다. 경찰을 시켜 선관위원 세 명을 울산관광호텔로 불러놓은 부산검찰이 체포, 연행하러 온 것이다. 나는 그 사실을 알고 울산관광호텔로 달려갔다. 연행되어 갈 선관위원 세 사람은 평소 나를 무척 가까이 살펴주는 선배이면서 체육회 간부였다. 이들을 부산지검의 검사가 수사관을 대동하고 와서 연행하게 되었다.
나는 울산시내를 벗어나는 신복 검문소까지 뒤따라갔다가 부산으로 달려가는 차량을 확인하고는 바로 회사로 돌아왔다. 회사에 이르러서 얼른 연행 사실을 기사로 쓰고 밤 9시 뉴스의 로컬 뉴스에 끼워 넣어두고는 돌아가게 되었다. 나는 뉴스를 편집해 넣으면서 국장이나 사장님께 보고하지 않았다. 그나마 라디오 뉴스니까 가능한 일이었지만 어쩐지 망설여지기도 했다. 워낙 큰 사건이었고 흥분 상태에 있는 시민들에게 그 사건을 한시라도 빨리 알리는 것이 그 분위기를 잠재울 것 같아서였다. 또 취재를 해놓고 만약 방송을 하지 않았다면 아예 회사가 망가지도록 돌이 날아왔을 것이다. 울산은 그때 무수한 고난의 가시밭길을 걸어가던 야당 투사가 많았다.
5일이 지난 뒤였다. 사장실에 찾아갔더니 부산으로 연행되어 갔던 그 사람들이 회사 상무의 부친과 함께 와 있었다. 그 상무의 부친은 HR의 매형이 되는 분이다. “그래서 우리가 누구 하는 일 때문에 했는데 그걸 방송해야 되는 건지 말 좀 해봐라. 우리는 이것을 명령에 따랐을 뿐이다.” HR을 내세우는 것이었다. 그들은 우리 회사와 어려운 일이 있을 때마다 상무의 부친을 꼭 앞세워 오곤 했다.
내가 사장실로 들어서자 그 중 한 사람은 눈을 부라리면서 사장님에게는 삿대질을 하며 대들었다. “회사의 일이나 다름없는 것을 기사를 써서 검찰에 연행되어 갔다 말이다. 그런 놈을 회사에 두나?” 담배를 연신 피우며 연기를 내뿜고 있던 사장님이 듣다못해 한마디 했다. “서울에 가서 허락을 받아오면 내가 해직 조치를 하겠다.” 그 말이 떨어지자 모두 다 입을 다물었다. 그들은 서울에 가서 허락을 받고 오라는 것도 HR의 허가를 받고 오라는 말로 받아들였다.
그 같은 사실은 즉시 HR에 보고가 되었고 그런 다음에도 내 신상에는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 HR은 그 후 나를 보고서도 그에 대한 말을 일체 하지 않았고 나도 그런 말을 다시 하지 않았던 것이다.
최종두 시인,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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