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주영의 연뮤덕질기](55) ‘불안’으로 빚어지는, 구체화한 ‘나’

2025-08-29

당혹하거나 혼란스러울 때 흔히 농담 반 진담 반 내뱉는 “나는 누구? 여긴 어디?”는 철학적 고민이기도 하다. “나는 누구인가? 어디로 가고 있는가? 무엇을 하고자 하는가?”로 풀어보면 정체성(국적·성별·직업 등 주어진 속성과 소속)과 아이덴티티(불안과 혼돈 속 선택하는 과정적 자아)에 대한 불안이 읽힌다. 초지일관이 왕도라고 생각했던 과거와 달리 조변석개가 자연스러운 현대인들에게 ‘아이덴티티’는 미완의 무정형 상태로 수용된다. 바로 인간은 세계 안에 던져져(피투성·Geworfenheit) 끊임없이 변화하는 ‘아직-아닌 것(noch-nicht)’, 즉 변동성과 가능성으로 열려 있는 존재라는 독일 철학자 마르틴 하이데거(1889~1976)의 ‘현존재(Dasein)’다. 올해 들어 하이데거의 현존재 개념을 떠올리게 하는 작품이 줄을 잇는 것은 이런 흐름과 무관치 않아 보인다.

연극 <로제타>(김정한 Yossef K. 작·연출, 장도혁 음악, 김상민 무대, 이승호·강상민 조명, 남상헌 음향)는 8명의 로제타(김성령·고인배·견민성·원경식·이경구·김하리·브래드 버지스·엠마 수 해리스 분)가 무대 위에 한 명씩 나와 자신의 실명과 함께 캐릭터를 소개하며 포문을 연다. 국적, 언어, 성별이 다른 8명의 배우가 차례로 무대에 올라 “그녀의 이름은 로제타 셔우드 홀입니다. 저는 ○○입니다. 로제타 역을 맡았습니다”라고 선언하는 모습은 익숙하면서도 낯설다. 외국인 배우가 섞여 자막 없이, 서로의 언어를 모른다고 강조하며 소통하는 경우는 흔치 않다. 19세기 말, 의대를 갓 졸업하고 모든 것이 극명하게 다른 조선에 선교차 들어와 큰 족적을 남긴 로제타 셔우드 홀이 접했을 수많은 난관과 경계를 관객들이 체험하도록 하는 장치다. 언어의 장벽, 다른 외모를 가진 여성이기 때문에 겪었을 난관 등이 8명의 로제타를 통해 재현된다. 동시에 극장을 울리고 리듬을 만들어가는 퍼커션과 첼로, 김정한 연출이 직접 연주하는 피아노와 기타로 구성된 라이브 밴드 음악은 끊임없이 낯설게 하는 8명 로제타의 재현과 퍼포먼스를 하나의 정서와 공감으로 융합해낸다. 작품에 감정의 색채를 덧칠하는 과정이다. 질병으로 혈육을 잃는 고통 등을 딛고 이타심으로, 인간의 존엄을 위해 모든 것을 바치는 행보가 뭉클하다. 8명 로제타의 우정과 연대는 놀이기구 같기도 하고 대형 선박 같기도 한 무대장치를 통해 신체 연극으로 극대화된다.

성 정체성 고민 담은 작품들

관객을 향해 선언하며 시작하는 것은 연극 <베이컨>(소피 스웨딘뱅크 작, 매튜 일리프 연출, 전서연 협력 연출, 이단비 번역, 나탈리 존슨·최영은 무대, 라이언 조셉 스탭포드·임재덕 조명, MWEN·임태형 음향)도 마찬가지다. 사춘기 소년들의 성 정체성에 대한 불안과 혼돈을 거대한 시소로 형상화해 색다른 몰입감을 선사한다. ‘차르르’ 베이컨이 구워지는 실감 사운드와 함께 카페에서 일하는 21세 마크(이휘종·조성태·김성현 분)는 “이건 내 얘기야. 아무에게도 한 적이 없어”라며 관객을 향해 방해하지 말고 질문하지 말라고 강조한다. 과거 큰 상처를 준 동갑내기 대런(이서준·김방언·신재휘 분)과 급작스레 마주한 흥분과 공포가 교차하면서 장면은 학창 시절로 전환된다. 관심이 커질수록 폭력적으로 변하는 대런과 차분히 내면을 들여다보는 마크의 정반대 성향은 비극으로 마무리된다. 마크를 칼로 찌르고 모멸감을 주며 소년원에 들어간 대런과 수년 후 재회한 마크는 그를 용서할까? 사춘기 청소년들의 심리변화를 섬세한 일상의 대화로 조각해 시소의 역동으로 시각화한 <베이컨>은 상징적인 조명디자인, 입체적인 사운드 디자인으로 그들의 불안을 관객들에게 전이한다. 성소수자 청춘들이 가톨릭 학교라는 제도적 벽 속에 갇혀 겪는 혼돈과 비극을 칼군무와 록사운드로 담아낸 <베어 더 뮤지컬>(존 하트미어·데이먼 인트라바톨로 작·작곡, 이재준 연출, 김윤영 각색, 이정미 가사, 원미솔 음악, 오필영 무대, 구윤영 조명, 정도영 안무)과 같은 주제를 다루지만 보다 상징적이며 시적이다.

현존재의 불안과 혼돈을 성 정체성과 연결된 억압된 감정으로 드러낸 작품들은 올해 대학로 공연계의 경향성이기도 하다. 창작 초연 뮤지컬 <올랜도 in 버지니아>(성종완 작·작사·연출, 김은영 작곡·음악, 이현정 안무, 박연주 무대, 나한수 조명, 권지휘 음향, 김성철 영상, 도연 의상) 역시 그러하다. 실존 인물 버지니아 울프(최수진·임찬민·김려원 분)와 비타 색빌웨스트(정우연·김이후·장보람 분)가 20년간 주고받은 서간문을 모티브로 그들의 사랑과 연대를 다룬 창작 초연 여성 2인극이다. 버지니아의 소설 <올랜도>를 매개로 시공간을 넘나들며 재직조한 분절적 구조가 특징적. 두 대의 피아노 라이브 연주와 넘버들 구성이 극 전체의 개연성을 지탱하며 서사를 보충한다. 200석대 소극장에서 보기 드문 화려하고 입체적인 영상 디자인과 배우들의 화려한 의상은 무대를 런웨이로 만든다. 연극적 액팅과 대사가 많아 음악극에 가까운 이 작품은, 정체성의 고민을 섬세하게 다루면서 젠더 차별에 대한 분노와 저항의 언어로 확장한다. 남성 성소수자 서사와 또 다른 결이다. <올랜도 in 버지니아>는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에 머물지 않고 “우리는 어떻게 연대할 것인가”라는 질문으로 관객을 이끈다.

몸에 각인된 현존재의 무대

소수자 서사를 화려한 무대로 형상화한 작품으로 뮤지컬 <두 낫 디스터브>(백각기린 원작, 안리준 극작, 이재준 연출, 김희은 작곡·음악, 홍유선 안무, 최영은 무대, 문동민 조명, 김혜민 영상, 이대원 음향)도 주목할 만하다. 어린 시절 꿈에서 본 괴물을 찾아 헤매는 화가 제스(김지온·윤재호·강유찬 분)와 에레보스 호텔 주인이자 괴물인 카이만(박규원·최호승·원태민 분)의 긴장과 사랑을 담은 판타지물이다. 시적인 가사와 캐릭터에 부합하는 강렬한 넘버들, 실감 사운드 디자인이 입체적 전환과 어우러져 무대를 몰입형으로 감각하게 한다. 기존의 중소극장 뮤지컬과 차별화되는 영화적인 무대미학은 관객의 호응으로 이어졌다. 제작사인 콘텐츠플래닝이 유료 객석 점유율 99%라고 밝힌 바 있는 올해 대학로 최대 흥행작품이다.

<로제타>의 놀이터이자 대형 선박 같은 무대예술과 <베이컨>의 시소와 조명디자인, <두 낫 디스터브>의 기이한 호텔과 괴물 그림, <올랜도 in 버지니아>의 시공간을 넘나드는 영상디자인과 화려한 의상 등은 “나는 어떻게 존재할 것인가”라는 질문을 던지는 매개이며 ‘아직 아닌 것’에 대한 ‘불안’의 시각화다. <베이컨>에서 팽팽한 시소의 역동, <올랜도 in 버지니아>에서 피아노 2대의 포효, <로제타>에서 쏟아지는 물줄기 아래 모인 8명 로제타의 해방감 등은 언어로 규정되기 전에 이미 몸에 각인된 ‘현존재’, 역동하는 아이덴티티의 감각이다. 하이데거는 불안이야말로 현존재를 드러내는 사건이라고 정의한 바 있다. 다른 작품들은 모두 8월 31일에 상연이 끝났다. <베이컨>은 9월 7일, <베어 더 뮤지컬>은 9월 14일, <올랜도 in 버지니아>는 10월 9일까지 서울에서, <로제타>는 9월 5일과 6일 부산에서 상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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