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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 기사에는 결과만 나옵니다. 누가 범인이고, 왜 범행을 저질렀으며, 실형 몇 년을 받았는지. 하지만 그 몇 줄을 위해 형사들은 며칠, 때론 몇 달도 버팁니다. 그렇다면 형사들의 수사는 어떻게 전개될까요. ‘강력계 25시’는 진짜 이야기를 담았습니다.

1995년 7월 5일.
박철웅(52) 대구시의원이 빗길을 뚫고 수성관광호텔에 도착한 시각은 오전 6시50분. 모 지방지 기자로부터 당선 소감 인터뷰 요청을 받은 지 30분도 안 돼서였다. 오후로 미뤄도 무리는 없을 테지만 기자는 지금밖에 여유가 없다며 끈질기게 대면을 요구했다. 전날 밤 선거사무실로 세 차례나 전화했으나 박 의원이 부재중이어서 연락이 닿지 못했다는 사정도 피력했다.
‘저희는 새벽부터 호텔에 와 있습니다. 의원님 꼭 좀 부탁드립니다.’
이쯤이면 거의 강매 수준이다. 이게 언론이 초선을 길들이는 방식인가 싶기도 하나, 한편으론 기자를 길들여보겠다는 호기심도 있다. 정치인이 기자와 공생해서 손해 볼 건 없다. 이쪽에서 먼저 편의를 봐줬으니 언젠가 보답하지 않겠는가, 그런 계산이다.
박 의원은 주차장 빈자리에 차를 대고 나왔다. 그러자 어떻게 알고는 남성 두 명이 잰걸음으로 다가왔다. “당선 축하드립니다. 이번에 민주자유당이 약세였는데 역시 저력이 있으시군요.” 운을 뗀 남성은 자신을 정치부 기자 김수엽(가명·34), 옆은 후배 김길수(가명·30)라고 했다. “비도 오는데 저희 신문사에서 인터뷰 진행하시죠. 사진 촬영도 그편이 더 수월할 테니.”
박 의원이 그러자며 자신의 차에 오르자 기자 둘이 조수석과 뒷좌석에 따라 탔다. 그리고 시동을 걸려고 할 때 박 의원은 정수리가 운전석 시트로 홱 젖히며 목구멍이 대번에 막히는 걸 느꼈다. 뒤에 있던 김길수가 전깃줄로 그의 목을 조른 것이다. 기도가 막힌 채로 어떻게든 숨을 뱉으려 몸을 뒤척이자 김수엽이 옆에서 드라이버로 옆구리를 찔렀다.
“가만히 있어, 새끼야! 계속 소리 지르면 확 이걸로….” 두 사람은 곧장 박 의원을 끌어내린 뒤 자신들의 엘란트라 뒷좌석으로 밀어넣고 팔다리를 묶은 뒤 눈에 반창고를 붙였다. 수요일 오전 7시. 목격자는 없었다.
“브로커 끼어서 당선된 거 맞잖아!”
호텔에서 3㎞ 떨어진 비산동의 무허가 건물 지하 창고. 공기마저 음습한 그곳에 박 의원을 감금한 납치범들은 8시간째 발길질과 욕설을 하며 부정선거를 자백하라고 강요 중이다.
그런 일은 결단코 없었다고 항변하면 어둠 속에서 주먹이 날아들고 고함이 귀를 찢는다. 대체 근거가 뭐냐고 물어도 마찬가지다. 이들이 원하는 건 따로 있다, 그런 직감이 들었다.
1995년 6월 27일 치러진 1회 전국 동시 지방선거에선 그 이름답게 여러모로 처음 시행된 제도들이 있었다. 출구조사의 원형인 선거 예측조사 결과가 개표 시작 전에 발표됐다. 공직자의 등록재산도 그간의 비공개 원칙을 깨고 이때부터 국민에게 공개됐다.
이 가운데 후자는 박 의원의 이름을 유권자에게 각인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그가 신고한 재산이 145억원이었기 때문이다. 광역의원 후보 중 가장 돈이 많다는 언론 보도가 빗발쳤다. 지역의 숨은 재력가인 그가 재산을 형성한 과정도 심층적으로 다뤄졌다.
“원하는 게 돈이냐?” 박 의원이 묻자 김수엽은 한숨 돌리며 담배에 불을 붙였다. “녹음 하나만 합시다. 그쪽이 부정선거로 조사받고 있으니 가족들에게 5억원을 준비하라는 내용으로.”

이날 오후 3시30분, 선거사무실에 있던 박 의원 동생이 납치범들의 전화를 받았다. 김수엽은 먼저 박 의원의 허위 자백이 담긴 육성 녹음본을 들려준 뒤 “의원을 살리고 싶으면 5억원을 준비해라. 경찰에 알리면 목숨은 없다”고 한 뒤 전화를 끊었다. 통화는 10초 내외, 반응할 틈도 없었다.
박 의원의 자택에서 긴급 가족회의가 열렸다. 인질 협상에 쓸 돈은 얼마든지 있다. 목숨을 온전히 지킬 수만 있다면 5억원이 대수겠나. 하지만 그들이 박 의원을 죽여놓고 돈만 가져갈 수 있다. 무턱대고 납치범과 만났다가 또 다른 가족이 봉변을 당하지 말란 법도 없다. 수백 번 고심한 끝에 박 의원 가족은 5시간이 지난 오후 8시30분 경찰에 납치 소식을 알렸다.
경찰에 비상이 걸렸다. 관할인 동부경찰서는 강·폭력계 형사들로 구성된 수사 전담팀을 구성, 박 의원의 자택으로 출동해 자세한 사정을 물었다. 범인의 목소리를 예전에 들은 적이 없나. 최근 이상한 일은 없었나. 누구에게 원한을 살 만한 일을 한 적은 없나. 박 의원 회사에 금전적으로 쪼들리는 사람은 없나. 가족들은 그저 고개를 저을 뿐이었다.
그리고 이날 밤, 저택 거실 전화기가 돌연 울리기 시작했다. 수화기를 든 박 의원 동생에게 김수엽은 “크라운 호텔로 나오라”고 했다. 동부전화국에서 발신지를 알아내려 했으나 통화 시간이 너무 짧아 한발 늦었다. 추적반으로 편성된 형사들이 접선 장소로 급파됐고, 박 의원의 아들 박모씨가 몸값 인도를 위해 나가게 됐다.
주변에 인적은 드물다. 퇴근 시간도 한참 전에 지났다. 호텔 앞이 번화가이긴 하나 통성명도 전에 술부터 마신다는 영업직 무리나 간간히 보일 뿐. 의외로 일찍 잡을지도 모른다는 낙관도 흘렀다. 다 제쳐두고 수갑 채우는 놈이 1계급 특진이다, 그런 일념의 형사들이 사방에 포진돼 있다.
모두가 숨죽이던 그때 박씨의 핸드폰이 울렸다. 발신자는 자택에 남은 작은아버지다. “아리아나 호텔 쪽으로 장소를 바꾼다고 한다. 경찰 안 치우면 형님 죽인다 하는데 어떻게 하냐.”
납치범이 좀 전까지 근방에서 이쪽 동태를 살폈다는 얘기다. 이를 경찰에 전하자 “우리가 빠지면 돈도 빠지고 의원님도 죽는다. 어서 가자”라는 답이 돌아왔다. 아리아나 호텔까지는 5㎞ 남짓에 일직선 도로. 차량 통행도 없어 도착까지 10분도 안 걸린다.
그리로 이동하자 또다시 자택에서 전화가 걸려왔다. 이번에는 동대구역 광장이다. 그쪽으로 이동했을 때 또다시 접선 장소가 바뀌었다. 이들은 납치범의 지시에 끌려다니다 새벽녘이 돼서야 대백프라자 앞에서 해산했다. 납치범의 연락이 끊겼기 때문이다. 부친의 생사를 알 수 없는 혼란 속에서 한참이나 진을 뺀 박씨에겐 대구 시내가 황망하게 보였을 뿐이다.

6일 오후, 눈이 가려진 채 감금돼 있던 박 의원은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도 감이 안 왔다. 그는 지난 삶을 반추해봤다. 살면서 누군가에게 해악을 끼친 적이 있는지. 사업은 필연적으로 상대를 밟고 올라가는 싸움이다. 알게 모르게 원성을 산 일도 있을 것이다. 선거도 마찬가지다. 당선자가 있으면 낙선자가 있다. 불만을 품은 누가 자신을 죽이라고 청부한 것은 아닐까. 허기와 공포 속에서 가족들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때 누군가의 인기척이 났다.
“우리 녹음 하나만 더 합시다. 계속 경찰 데리고 다니면 당신 손가락 하나씩 자른다는 걸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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