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동자의 사랑

2024-10-09

얼마 전 좋아하는 시인의 시를 읽다가 마음에 오래 남은 구절을 보았다. “나는 나의 내면을 보려다 눈동자 하나를 발견한다./ 누구의 눈인가?/ 알 수 없다.” 배시은의 ‘수면의 신’(<창작과비평> 2024년 가을호)이다. 화자는 생각이 많은 모양이다. 잠자지 않고 깨어 있는 동안 누군가를 보고 싶어하거나 무언가를 저울질하기를 멈추지 못한다. 자신의 마음을 들여다보려는 순간, 보이는 것은 누군가의 깊은 눈동자. 그러자 예상치 못하게 무언가를 보려는 능동적 행위는 곧 스스로가 보이는 수동적 행위가 된다. 이 매력적인 시를 읽고 나면 니체의 유명한 잠언에서 ‘심연’이라는 단어를 ‘눈동자’로 바꾸어도 어색하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된다: 당신이 눈동자를 오래 바라본다면, 눈동자 또한 당신을 바라볼 것이다.

누군가의 눈동자를 바라보는 일은 이상한 일이다. 손, 코, 귀, 입 등 다른 신체 부위를 바라보는 일에 비할 바 없이 그렇다. 아마도 그 눈동자를 바라보는 주체 역시 눈동자이기 때문일 것이다. 눈동자와 눈동자가 마주치는 일은 서로를 마주 본다는 것이다. 어느 문화권에서는 서로의 눈을 아주 오랫동안 바라보는 행위로 결혼 의례를 대신한다고도 하는데 과연 그럴 만하지 않나. 누군가의 눈동자를 깊이 바라보면 그 안에는 내가 보인다. 자세한 표정까지는 아닐지라도 흐릿한 윤곽은 보인다. 희미하기에 더욱 기묘한 존재감이 있다. 거울이 보는 이의 외양을 그대로 되비춘다면, 눈동자는 보이는 이의 존재 속으로 보는 이를 끌어당긴다. 모든 눈동자에는 보는 이와 보이는 이의 존재를 뒤섞는 아득한 깊이가 있다.

아득한 눈동자에 대해서라면 많은 시인이 썼지만 허수경의 ‘눈동자’(<빌어먹을, 차가운 심장>, 문학동네, 2011)만큼 쓸쓸하고 아름다운 시는 읽은 적이 없다. 전문이 길지 않아 옮길 만하다. “죽은 이들 봄 무렵이면 돌아와 혼자 들판을 걷다 새로 돋은 작은 풀의 몸을 만지면서 죽은 이들의 눈동자 자꾸자꾸 풀의 푸른 피부 속으로 들어가다 마치 숲이 커다란 눈동자 하나가 되어 그 눈동자 커다란 검은 호수가 되어 검은 호수가 작은 풀끝이 되어 나를 자꾸 바라보고 있는데 내버려두었다네, 죽은 이들이 자꾸 나를 바라보는데, 그것도 나의 생애였는데// 그 숲에는 작은 나무 집이 하나 있었다 집 앞 닫혀진 문 앞까지 걸어갔다 집 안은 아직 겨울이었고 결혼 대신 시를 신랑 삼았던 여성 시인이 있었다 시인의 저녁 식사에 올려진 양의 눈동자, 이방의 종교처럼 접시에 올려진 양의 눈동자, 여성 시인을 신부 삼은 시는 물끄러미 바라보다 시를 쓴다, 애인아, 이 저녁에 나는 당신의 눈동자를 차마 먹지 못해 눈동자를, 적노라, 라고.”

이 시에서 눈동자는 죽은 이들의 눈동자다. 더 정확히는 작고 연약하고 죽은 이들의 눈동자다. 화자는 혼자 들판을 걷다가도, 저녁 식사를 하다가도, 그 눈동자들을 본다. 작은 풀, 커다란 숲, 검은 호수 어디에도 눈동자가 스며 있기 때문이다. 아니, 더 정확히 말하자면 화자가 어디에서나 그 눈동자에 깃든 슬픈 죽음과 끔찍한 문명을 느끼는 눈을 가졌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화자는 식사 중 식탁 위 양의 눈동자에서 참혹함을 느낀다. 눈동자는 그걸 바라보는 이를 부끄럽게도 망연하게도 한다. 그러나 먼발치에서 바라보고만 있지는 못하게 한다. 눈동자는 보는 행위만으로 주체와 대상의 경계를 조금씩 지운다. 그리고 그 눈동자에 담긴 기나긴 역사에 연루시킨다. 화자는 그렇게 자신을 바라보는 작고 연약한 이들의 삶 역시 “나의 생애”라고 말한다. 까맣고 아득한 다른 존재의 생애에 조심스럽게 그러나 깊이 연루시키는 것. 그것이 눈동자가 하는 사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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