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세 침략때 외교·내정개혁 주장
한주학파 심즉리설 공인 이끌어
실천·의리 중시 후진 양성 노력
"과학기술문명, 편리·안락 주지만
오·남용하면 지구촌 파멸 불러와"
'남명 K-기업가정신 아카데미' 10주차
강사: 김종진 박사
주제: 면우 곽종석의 학행과 남명사상 계승
남명 K-기업가정신 아카데미는 10주차 강의로 지난 11일 '면우 곽종석의 학행과 남명(南冥)사상 계승'이라는 주제로 김종진 박사가 특강을 했다. 김종진 박사는 "만우 곽종석은 남명 조식선생의 정신을 계승해 학문연구 영역과 제자양성 등의 부분에서 매우 유사함을 보여준다"며 "이러한 그의 정신은 글로벌 창업주의 K-기업가정신에 영향을 줬다"고 제시했다. 김 박사는 "K-기업가정신이 지금까지 경제적 번영을 추구한 발자취를 넘어 인류 공동 번영에 이바지하는 사상으로 발전해야 할 때"라고 강조했다.
■ 곽종석의 생애
면우 곽종석(郭鍾錫, 1846~1919)은 남명학의 본고장인 경상 우도에서 태어나 남명 사상의 영향 속에 성장했다. 25세 때까지 두터운 가학(家學)의 바탕에서 수학해 자신의 주리(主理) 철학을 확립한 후, 퇴계학파의 한주 이진상에게 입문하게 된다. 이진상의 한주학파 심즉리설(心卽理說)이 자신의 이론과 같음을 알고, 그것을 평생의 종지로 삼아 오랜 논변을 거쳐 대표적 학설로 다졌던 큰 학자였다. 그의 학문은 성리학, 경학(經學), 예학(禮學) 등 모든 분야에 뛰어났다.
그러나 지식인으로서 나아갈 길은 험난했다. 서세동점이라는 문명사적 대전환기를 맞아 나라를 통째로 빼앗기는 일을 겪으며 불행한 삶을 겪었다. 외세의 침탈에 처한 상황에서 그가 요구받은 것은 오로지 떨쳐 일어나 희생하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곽종석은 주리의 철학자로서 냉철한 이성적 판단으로 대처했고, 기세를 앞세워 분기탱천하는 자세를 무모한 것으로 여겼다.
고종 임금의 연이은 부름에는 자신이 벼슬에 나아가도 해결할 수 없다고 판단, 사양했다. 사방에서 들고 일어난 의병의 대열에도 실효성이 없음을 알고 참여하지 않았다. 주변의 비난이 있었지만 흔들리지 않았다. 반면에 가능성이 조금이라도 있으면 주저 없이 행동했다. 제국주의 열강에 외교로 일본의 야욕을 알려 견제하고, 내정 개혁으로 국정을 쇄신할 것을 주장했다.
곽종석이 나라를 잃었지만 식자가 후진 양성 교육을 계속해야만, 때가 되면 국권을 되찾을 수 있음을 알았기 때문이었다. 종국에는 자신의 소신대로 파리장서 의거를 감행 후, 일제에 잡혀 생을 마감했다. 문집 63책을 남겼고, 향년 74세였다.
■ 학문 세계
곽종석의 학문은 철저히 강화된 주리의 '성리학', 독보적으로 경전을 해석한 '경학', 옛 의례의 근본을 확립하는 '예학'으로 대별된다. 곽종석의 성리학에서 대표적으로 드러난 심즉리설은 한때 퇴계학파로부터 이단시 돼 맹렬한 공격을 받았다. 퇴계의 심합리기설(心合理氣說)은 마음의 본체(理)와 작용(氣)을 대등하게 포괄해 융합하는 이기호발설(理氣互發說)을 말한다.
한주학파 심즉리설은 리발일도설(理發一到說)로 마음의 본체만 리로 간주하니, 기를 빼버린 것처럼 보인다. 물론 곽종석은 마음의 미발 상태인 본체를 리(理)라는 것이지 정(情)으로 발할 때의 기는 엄연히 존재함을 강조했다. 그런데 양명학의 심즉리설은 마음 자체가 리이며, 마음 바깥에는 아무것도 없고, 마음 자체에 모든 것을 수용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를 보면, 이원적인 심합리기설과 일원적인 양명학의 심즉리설이 다르면서도 오히려 비슷해 보이고, 한주학파의 심즉리설과 심합리기설은 절반은 달라 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곽종석의 집요한 노력으로 도산서원으로부터 한주학파 심즉리설이 퇴계의 심합리기설을 발전적으로 계승한 것이라는 공인을 받았다. 곽종석의 경학을 드러낸 '다전경의답문'은 후학이 편지글에서 간추려 엮은 책으로 그 내용이 질적 양적으로 매우 방대하다. 또, 명덕(明德)이 마음의 영역에 국한되지 않고 선험적인 본원과 후천적 경험을 포괄하고 아우르는 것으로 보는 해체용(諧體用)의 사고는 뒷날 곽종석이 위정척사의 입장에서 동도서기론적이며 개화적인 자세로 변천하는 바탕으로 작용했다.
그것은 현실 문제 타개를 위한 임시방편의 권도(權道)였고, 유학의 이상에 대한 그의 신념까지 변한 것은 아니었다. 또, 그의 예학은 밀려드는 서구 풍물에 대항해 근본적인 의례 확립으로 극복하려는 것이었다.
■ 남명 사상 계승
곽종석은 남명 학파의 풍토에서 성장해 부지불식간에 남명 사상의 영향을 받았고, 경의(經義)를 바탕으로 하는 실천과 의리를 중시했다. 학문 태도 또한 열린 사고와 다양한 분야를 섭렵해 남명과 비슷한 점을 보였다. 남명이 교육을 통한 후학 양성에 주력했듯 곽종석도 후진 양성을 위해 필생의 노력을 기울였다. 남명의 유적을 발굴 복원하고, '남명집' 간행에 힘쓰고, '신명사도'와 '입덕문부'를 지었으며, 지역 인물에 대한 글에서 남명의 언행이나 사상을 드러내는 내용을 무수히 인용했다.
■ 진주 정신과 곽종석
곽종석은 진주지역에서 남명 사상의 명맥을 이은 큰 학자로 많은 제자를 길러 상당한 사상적 영향을 남겼다. 이러한 영향은 진주 정신이 무르익는 데 기여했고, 지역에서 일어난 삼성, LG, 효성 등 3대 재벌의 K-기업가정신이 잉태되는 바탕이 됐다.
그러나 K-기업가정신이 순전히 남명 사상의 영향으로만 일어났다고 생각하면 안 된다. K-기업가정신을 잉태한 진주 정신은 남명 사상을 바탕으로 진주의 저항정신, 평등사상(형평운동), 실학적 사고 등이 진주라는 용광로에서 무르녹아 융합된 사조이기 때문에 단선적인 시각으로 바라보아서는 안 된다. 따라서 진주 정신에 뿌리를 둔 K-기업가정신은 지금까지의 사업보국이라는 경제적 카테고리에 머무르지 말고, 앞으로는 미래지향적 확장성을 갖춰 나아가 인류 보편의 천리와 인륜을 구현하는 데 이바지하는 방향으로 발전해야 한다.
여기서 100년 전 면우 곽종석의 서구 문명에 대한 예언적 언사를 살펴보면 더욱 K-기업가정신이 나아가야 할 방향성을 짐작할 수 있다. "저들의 학문은 천리(天理)와 인륜의 올바른 것에 근본 하지 않고 오직 기기(氣機)의 조화를 추측해 공리(功利)의 사사로움을 추구하고 통달할 뿐이다. 이처럼 해 마지않는다면, 그 기술이 지극히 정밀하고 깊은 곳에 이르게 될수록 사람이 귀매(鬼魅)가 되고 금수(禽獸)가 됨이 더욱 정밀하고 깊게 될 것이다." 여기서 보이는 곽종석의 혜안은 오늘날 극도로 발달한 과학기술 문명이 인류에게 편리와 안락을 주지만, 아무런 반성 없이 거기에 매몰돼 무서운 지구촌 파멸을 초래할 수도 있다는 것을 말해준다. 이야말로, K-기업가정신이 지금까지 경제적 번영을 추구한 발자취를 넘어 인류 공동 번영에 이바지하는 사상으로 발전해야 할 때임을 말해주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