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에게나 맘속에 품은 장소가 있다

2025-02-25

누구나 마음속에 잊히지 않는 게 있다. 첫사랑일 수도, 노래일 수도, 학창시절일 수도 있다. 사는 일에 치여 얼마간 잊어버렸다 해도 문득문득 떠오른다. 나에게는 청춘 시절 찾았던 극장이다. 오랫동안 한국영화를 방화라고 했다. 할리우드에 비해 변방에 있다는 의미다. 자괴감이 드는 말이다. 컴퓨터·인터넷도 없고, 해외여행은 꿈도 꾸지 못했던 곤고했던 시절, 그땐 극장가기가 유일한 즐거움이었다. 성인물을 보기 위해 형·누나 옷을 입고 극장을 찾았다. 학생주임 선생님이 무서웠기 때문이다. 그때 선생님들은 왜 모두 애꿎은 귓바퀴를 잡고 끌어당겼을까. 지금도 궁금하다.

가난했던 시절, 영화구경은 가장 싸게 치이는 데이트였다. 거리에는 극장이 많았다. 종로 3가 단성사와 피카디리, 광화문 네거리 국제극장, 명동 입구 중앙극장과 충무로 명보극장·스카라극장, 퇴계로 대한극장, 낙원상가 허리우드 극장, 을지로 국도극장은 당시 젊음들이 순례하듯 찾던 공간이었다. 그 컴컴한 공간에서 닥터 지바고, 벤허, 로미오와 줄리엣을 보며 저마다의 사랑을 꿈꿨다.

맑은 날에도 비가 내리는 재개봉관도 많았다. 시인 기형도가 숨진 파고다극장, 우미관 등도 있다. ‘가시를 삼킨 장미’란 의미심장한 영화 제목이 내걸렸던 이대 입구 대흥극장도 생각난다.

지금은 상상조차 어렵지만 그땐 담배 연기 자욱한 극장도 낯설지 않았다. 뿌연 연기 덕분에 스크린은 더욱 흐릿하게 보였다. 지금은 역사가 돼 버렸지만 의무적으로 봐야 했던 대한뉴스도 빼놓을 수 없다. 재개봉관의 경우 코 고는 소리까지 들려왔다. 겨울날, 시린 발을 동동 구르며 영화를 보고 옆자리의 여자친구 손을 가만히 훔쳐 잡았다. 난방·냉방도 제대로 되지 않았던 극장. 그런데도 그러려니 하고 사람들은 극장을 찾았다. 요즘에는 쾌적한 복합영화관이 대세다. 그리고 그 많던 정들었던 극장들은 서울 거리에서 대부분 흔적조차 찾을 길 없다. 표지석이라도 하나 있었으면 하는 게 나만의 바램일까.

김동률 서강대 교수

Menu

Kollo 를 통해 내 지역 속보, 범죄 뉴스, 비즈니스 뉴스, 스포츠 업데이트 및 한국 헤드라인을 휴대폰으로 직접 확인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