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리우드 컬트의 제왕이 떠났다. 드라마 ‘트윈 픽스’, 영화 ‘이레이저 헤드’, ‘블루벨벳’, ‘멀홀랜드 드라이브’ 등을 만든 미국 거장 데이비드 린치 감독이 생일을 불과 나흘 앞둔 16일(현지 시간) 별세했다. 향년 78세. 주요 외신은 “선견지명의 영화 감독”(NYT), “다재다능한 르네상스맨”(데드라인) 등의 부고를 앞다퉈 냈다.
폐기종 투병 고백, 최근 LA 산불로 대피
사인은 공개되지 않았지만 지난해 그는 자신의 X 계정을 통해 평생 흡연의 결과로 폐기종 진단을 받고 집 밖에 나가기 어려운 상황이라 밝혔다. 지난 9일엔 투병 중인 린치가 대형 산불로 인해 LA 자택에서 대피한 사실이 무비웹 등 현지 매체에 보도되기도 했다.
16일 유족은 린치의 페이스북 계정을 통해 “우리 가족은 깊은 슬픔을 느끼며 예술가이자 한 인간 데이비드 린치의 별세를 발표한다”면서 “세상에 큰 구멍이 생겼다. 하지만, 그가 말했듯이 구멍이 아니라 도넛을 보라”고 전했다. 이는 린치의 2006년 저서 『데이빗 린치의 빨간방』을 인용한 것. 책에서 그는 창의성의 비결로 ‘도넛의 구멍이 아니라 도넛을 보라’고 적었다.
몽환적 VS 난해…'린치적' 컬트 대명사
린치는 공포와 필름누아르, 초현실주의, 블랙 코미디를 혼합한 실험적 연출로 몽환적이란 극찬과 난해하다는 엇갈린 평가 속에 세계적 팬덤을 거느렸다.
그는 1946년 미국 몬태나주 작은 마을에서 태어나, 농무부 소속 연구원인 아버지의 작업실에서 창작에 눈 떴다. 펜실베이니아 미술 아카데미 등에서 수학한 뒤 단편 애니메이션을 제작하며 영화계 입문했다.
1970년 LA 미국영화연구소(AFI) 산하 영화학교에 입학해 5년(1971~1976)에 걸쳐 저예산 장편 데뷔작 ‘이레이저 헤드’(1977)를 완성했다. 기형아를 낳은 젊은 부부의 이야기를 평단은 혹평했지만 프랜시스 포드 코폴라 감독 등에겐 반향을 일으켰다.
이어 19세기 영국 기형아 실화 기반의 두 번째 영화 ‘엘리펀트 맨’(1980)이 흥행에 성공, 아카데미 작품상 등 8개 부문 후보에 오르면서, ‘린치적’이란 수식어까지 탄생했다. “이상하고 불안하고 비선형적이며 심지어 변태적”(베니티페어)이란 의미로, 그의 독보적 작품 세계를 예견한 단어가 됐다.
타란티노 "린치의 '듄' 여러 번 봐"
최근 동명의 할리우드 리부트 판이 개봉하며 재조명된 그의 첫 SF 블록버스터 ‘듄’(1984)은 당시 흥행과 비평 모두 참패했지만, 독특한 연출로 회자됐다. 이후 섹스와 폭력으로 얼룩진 미국의 초상을 과감하게 그린 ‘블루 벨벳’(1986)으로 2년 만에 컬트 거장의 명성을 되찾았다.
니컬러스 케이지, 로라 던 주연의 범죄 로드무비 ‘광란의 사랑’으로 1990년 칸영화제 황금종려상을 차지하며 세계적 거장 반열에 올랐다. 대중적 명성을 높인 작품은 같은 해 TV 수사물 ‘트윈 픽스’(1990~1991)다. 한 시골 여성의 살인사건을 그려 높은 시청률을 기록하며 1993년 한국에서도 방영됐다.
독특한 순환 구조 스토리로 화제가 된 ‘로스트 하이웨이’(1997), 아카데미‧칸 수상 후보에 오른 ‘스트레이트 스토리’(1999)에 이어 할리우드 배경의 첫 디지털 연출작 ‘멀홀랜드 드라이브’(2001)는 “린치 미학의 결정체”로 불리며 칸 감독상 등을 휩쓸었다.
마지막 장편 영화는 ‘인랜드 엠파이어’(2006)로, 이후 단편영화 및 뮤직비디오, 화가로서 미술 작업에 몰두했다. 2017년 ‘트윈 픽스’ 25년 후 이야기를 그린 새 시즌 ‘트윈 픽스: 더 리턴’을 복귀작으로 선보이기도 했다. 데뷔 초부터 단련해온 초월 명상법을 자신이 설립한 '데이비드 린치 재단'을 통해 전파하기도 했다.
오스카 공로상 역대 최단 1분 소감
린치는 예술적 공로로 2006년 프랑스 정부가 주는 최고 영예인 레지옹 도뇌르 훈장, 같은 해 베니스영화제 평생공로상을 받았다.
후보만 4차례(작품‧감독상 등) 오르고 수상과 거리가 멀었던 아카데미 시상식에서도 2020년 마침내 오스카(아카데미상 애칭) 평생공로상을 받았다. 당시 1분도 안 되는 역대 최단 수상 소감도 화제였다. 주최 측과 다른 수상자에 감사와 축하를 전한 뒤 오스카상을 두고 “매우 흥미로운 조각상”이라 촌평을 남겼다.
스필버그도 존경…케이지 "독보적 천재"
'감독들의 감독'이었다. “감독은 (마음속) 느낌에 충실해야 한다”(인터뷰집 『데이비드 린치: 컬트 영화의 기이한 아름다움』), “인생은 혼란스럽고, 영화도 그래야 한다”(IMDB) 등 린치의 연출 철학은 제임스 건(‘가디언즈 오브 갤럭시’) 등으로 이어졌다. 스티븐 스필버그는 자전적 영화 ‘파벨만스’(2022)에서 20세기 우상 존 포드(1894~1973) 감독 역에 린치를 카메오 출연시켜 존경을 표했다. 쿠엔틴 타란티노는 “이미 린치의 ‘듄’ 시리즈를 여러 번 봤기 때문에 (리부트 신작을) 다시 볼 필요성을 느끼지 않는다”고 말했다.
별세가 알려지자 할리우드엔 애도사가 물결쳤다. 론 하워드 감독은 자신의 SNS에 “은혜로운 사람이자 두려움 없는 예술가. 자기 영혼을 따른 급진적 실험이 잊을 수 없는 영화를 만든다는 걸 증명했다”고 린치를 추모했다. 배우 니컬러스 케이지는 “영화계의 독보적 천재였으며, 전 시대를 막론하고 가장 위대한 예술가”라 기억했다.
“영화관에 들어가 불빛이 꺼지는 순간은 마술적인 느낌이 든다. (중략) 그러면 당신은 다른 세계로 들어가는 것이다”(『데이빗 린치의 빨간방』)라고 고백했던 린치. 영원한 컬트의 세계에서 잠들게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