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동료시민들에게 “안녕하시냐”고 묻고 싶다. 어떻게 해가 바뀌었는지, 새해에는 무슨 계획을 세워야 할지 도무지 가늠하기 힘든 상태로 2025년을 맞이했다. 지난해 12월3일 밤에 시작된 계엄 선포와 헌정질서 파괴에 대한 수습은 43일째인 오늘까지 지지부진한 채, 윤석열 체포라는 중간 고비를 넘었을 뿐이다. 광장에서는 희망과 실망이 오가고 운동 차원에서는 포스트 윤석열 시대의 정치와 사회에 대한 논의가 활발하다. 거대 양당은 이를 관망하면서 이해득실을 계산하고 있다. 사태가 진정되기를 지켜보는 게 어느덧 지루하면서도 터질 게 터졌고 걷잡을 수 없이 위험한 상태로 가기보다는 한국 민주주의의 전화위복이 될 거라는 기대가 더 높다. 무엇보다 온 국민이 지켜보고 있다.
더욱 불안한 일은 제주항공 여객기 참사나 태평양 건너 일이지만 우리와 무관하지 않은 캘리포니아의 산불 소식이다. 자연과 인간이 대규모로 충돌하면서 돌이킬 수 없는 재난으로 이어지는데도 이를 바라보는 시각이 비교적 단순하고 사회적 관심과 논의 역시 미흡하다고 느껴지기 때문이다. 점점 크고 복잡해지는 글로벌 사회체제의 함정을 고발한 ‘위험사회’라는 사회학 개념은 인간의 힘이 자연을 움직이는 ‘인류세’라는 인문학, 사회과학, 자연과학을 통합한 개념으로 발전했다. 그런데도 지구적 위험이자 인류적 재난은 일회적인 사고, 불행한 사건, 특정한 누군가의 책임으로 여겨지거나 인간사회의 불평등이 반영된 것으로 축소되기도 한다.
제주항공 여객기 참사는 천재와 인재가 합쳐진 사고다. 항공기가 자기 몸집보다 10배 큰 새 떼와 충돌하면서 엔진 고장을 일으킨 게 1차 사고원인이다. 이밖에 정비 불량, 콘크리트 둔덕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해 참사를 일으킨 것으로 추정된다. 정비나 둔덕에 책임이 있는 기업, 공무원에게 책임을 묻는 게 정해진 수순이다. 직접 원인을 제공한 새 떼에 대한 대책 역시 감시인력 부족, 첨단 자외선 감지기 등 장비 부족의 문제로 환원된다. 공항 주변에 철새 도래지가 4곳이나 있어 애초에 공항으로 적합하지 않은 데다 겨울에는 철새가 대규모로 서식한다는 사실은 가장 근본적임에도 주변 정보로 취급된다. 그래서 새로 짓는 8곳의 공항에는 인력과 장비를 더 늘리자는 ‘인간적’ 처방이 난무한다.
우리 모두 지역마다 공항이 필요한 걸 안다. 중앙과 지방의 격차가 갈수록 커지는 상황에서 공항은 지역민의 자존심만 충족시키는 게 아니라 생산과 소비에 필요한 물류를 담당한다. 용지 확보 문제로 바다와 가까운 ‘빈 땅’으로 가야 하는 것도 인정한다. 문제는 사람이 살지 않는다는 점에서 비어있지만 수많은 생명, 자연이 활동한다는 사실이다. 코로나19 팬데믹 그리고 이번 참사에서 확인했듯 인간이 통제하는 것처럼 보이더라도 자연은 인간의 손아귀를 빠져나간다. 새 떼는 예고 없이 날아오르고 기후위기로 달라진 생태환경은 그들의 움직임을 더욱 종잡을 수 없게 한다.
캘리포니아 산불은 호주 산불, 캐나다 산불을 뛰어넘는 역대급 재난이다. 태평양 연안의 부촌 퍼시픽 팰리세이드가 전소됐고 로스앤젤레스의 심장인 할리우드, 베벌리힐스까지 소개령이 내려졌다. 어느 셀럽의 집이 불타고 다른 착한 셀럽들이 이재민을 위해 거액을 기부했다는 한가한 소식을 전할 때가 아니다. 부자들은 사설 소방관을 동원해 자기 집만 보호한다는 점에서 재난의 부익부 빈익빈을 지적하지만 모두 불탄 가운데 멀쩡한 집은 결코 괜찮지 않다. 천사의 땅 로스앤젤레스가 지옥으로 변하는 가운데 갈수록 건조해진 기후, 강해진 북동풍(이 바람의 이름은 샌타애나), 부족한 용수, 노후한 기반시설 등이 작용한 복합재난에 ‘기후 채찍질’이란 새로운 용어가 등장했다. 자연은 인간사회의 복잡한 정치와 계급을 후려친다.
이런 재난을 강 건너 불구경하는 우리에게 “정말 괜찮은 거냐”고 묻고 싶다. 오늘, 한국 역사상 최초로 현직 대통령이 수사기관에 체포되었다. 2500년 전 고대 그리스에서 시작된 민주주의의 역사는 여전히 미완성이다. 인간의 문명이 사라지지 않는 한 권력과 정의를 둘러싼 갈등과 투쟁은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자연의 역습도 시작됐다. 자연재난은 늘 있었지만 인간이 원인을 제공하고 그 피해를 고스란히 감당하는 인류세의 재난은 성격도 규모도 다르다. 그 위험과 한계를 인식하면서 인간사회의 민주주의와 정의를 구현해야 한다. 이를 생태민주주의라고 부르기도 한다. 포스트 윤석열 시대를 준비한다면 이런 논의가 반드시 필요하다. 항공기로 돌진하는 새 떼를 막을 수는 없다는 걸 인정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