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 피땀으로 ‘한강의 기적’… 독재 항거 ‘민주주의’ 동시 일궈 [심층기획-대한민국, 위기에서 길을 찾다]

2025-01-15

<1부> 한민족 국난 극복사

3회 - 산업화·민주화의 기적

해방 후 한국전쟁 전 국토 잿더미 변해

정부·국가 주도 기술·노동자 대거 양성

수출 주도 성장 추진 비약적 경제 발전

기업들 경쟁력 ‘톱’… 세계 IT 강국 도약

장기집권 꾀한 정권에 국민 거센 반발

4·19혁명, 5·18 민주화운동 등 이어져

1997년 DJ 정부 첫 평화적 정권 교체

외환위기도 극복… 선진민주국가 ‘우뚝’

2021년 7월2일, 스위스 제네바에서 유엔무역개발회의(UNCTAD) 제68차 무역개발이사회 마지막 회의가 열렸다. 이날 참여한 회원국들은 만장일치로 대한민국의 지위를 선진국 그룹(B그룹)으로 변경했다. 이는 UNCTAD가 1964년 설립된 이래로 개도국에서 선진국으로 이동시킨 첫 번째 사례였다. 한국은 유엔 차원에서 선진국으로 공식 인정받은 것이다.

2022년 기준으로 1인당 국민 총소득(GNI) 3만4994달러, 유엔개발계획(UNDP)의 인간개발지수(HDI) 세계 19위, 미국의 US뉴스&월드리포트의 국가별 국력(power) 평가 순위 세계 6위. 선진국 지표로 불리는 30-50클럽에 세계 7번째 국가로 포함되기도 했다. 1인당 국민소득이 3만달러 이상, 인구가 5000만명 이상인 국가가 대상이다.

무엇보다 한국은 인구 5000만명 이상 국가 가운데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산업화와 민주화를 동시에 이룬 유일한 나라로 평가받는다. 한국전쟁으로 잿더미가 된 나라에서, 체제를 달리하는 북한과 대치하는 분단국가라는 한계를 극복하고 이뤄냈다는 점에서 큰 성과가 아닐 수 없다. 경제적 발전과 민주주의 국가 체제를 안착시키는 여정은 혹독했다. 국민의 피와 눈물을 바탕으로 한 ‘한강의 기적’과 지난한 ‘민주화 역정’이 필요했다.

◆폐허에서 이룬 ‘한강의 기적’

1960년 4?19혁명을 통해 성립된 장면정부는 야심 찬 경제개발 계획과 국토개발 사업에 착수했다. 장면정부의 구상은 이듬해 일어난 5?16쿠데타로 실현되지 못했다. 새롭게 권력을 잡은 박정희정부는 민주당 정권의 경제개발 정책을 변형시켜서 5개년 계획으로 추진했다. 자본과 기술이 다른 나라보다 열악하다고 판단하고 기존 균등성장 전략에서 수출 주도형 불균등성장 전략으로 변형해 추진한 것이다. 사공일 전 재무부장관은 ‘한강의 기적’과 관련한 포럼에서 “당시 남미와 인도 등 주요 개발도상국들이 수입 대체 전략을 취한 것과 달리 대한민국이 수출 주도의 ‘대외지향적 개발전략’을 채택한 것은 당시 세계 경제 여건을 고려할 때 가장 적절했다”고 평가했다.

정부와 국가 주도로 이뤄진 경제개발은 외국의 자본과 기술을 적극 도입하는 한편 노동력을 총동원해 해외 수출을 늘리는 방향으로 진행됐다. 이에 맞춰 학교 교육과 산업 연수를 확대해 기술자와 노동자를 대규모로 양성했다. 국민도 시장과 공사장, 공장 등 열악한 환경 속에서 묵묵히 땀을 흘렸다. 삼성과 현대그룹을 각각 창업한 고 이병철, 고 정주영 회장 같은 기업가들의 열정과 노력도 경제발전의 한 축을 이뤘다.

1970년대가 되자 경제성장이 가시화하기 시작했고, 1970년대 후반부터 그 속도가 빨라졌다. 대만 등과 함께 ‘아시아의 4룡’으로 조명받은 시기였다. 1970년대 오일쇼크, 1980년대 국내 정정불안으로 위기를 맞기도 했지만 민주주의 체제가 자리 잡으면서 경제성장의 질도 개선됐다. 1990년대 철강, 조선, 자동차, 반도체 분야를 중심으로 세계 10위권의 무역 대국이 됐으며, 1995년에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에 가입했다.

◆굴곡 많았던 민주화 역정

“한 가지 내가 부탁하고자 하는 바는 이북에서 우리를 침략하고 공산군이 호시탐탐하게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명심하고 그들에게 기회를 주지 말도록 힘써주기를 바라는 바이다. 첫째는, 국민이 원하면 대통령직을 사임할 것이며….”

1960년 4월26일, 이승만 대통령은 이 같은 성명을 발표하고 물러났다. 민주주의 사수를 외치며 학생들이 앞장서고 시민들이 가세해 많은 피를 흘린 결과였다. 4?19혁명이었다.

하지만 박정희 장군 등 군부는 이듬해 군사 쿠데타를 일으켜 민주당 정권을 붕괴시켰다. 1963년 전역 후 직접 선거를 통해 대통령에 당선된 박정희 대통령은 1970년대 베트남이 공산주의로 통일하고, 미국과 일본이 중국과 수교 교섭을 하는 등 국제정세가 급변하자 1972년 비상계엄을 선포하고 헌법을 개정해 독재체제를 강화했다.

1979년 10월 박 대통령 피격 후 짧았던 ‘서울의 봄’은 전두환을 비롯한 신군부 정권으로 이어졌다. 1980년 5·18 광주민주화운동과 1987년 6월 항쟁은 대한민국이 민주주의 국가로 성장하는 동력이 됐다. 국민의 자발적인 참여, 희생으로 이룬 성과다. 특히 대통령 직선제 개헌을 성공시킨 1987년 항쟁은 민주주의 국가로 자리매김하는 제도적 절차를 공고히 하는 계기가 됐다. 정치학자 새뮤얼 헌팅턴은 두 번의 정권교체를 내실 있는 민주주의 요건으로 꼽았는데 1997년 투표를 통한 첫 정권교체 이후 여러 차례 정권교체가 이뤄졌다.

◆위기 때마다 뭉친 국민

“시급한 외환 확보를 위해 국제통화기금(IMF)의 자금 지원체제를 활용하겠습니다. 이에 따른 다방면에 걸친 경제 구조조정 부담도 능동적으로 감내해 나가도록 최선을 다할 것입니다.”

아시아의 금융위기로 촉발된 외환위기를 맞은 1997년 11월22일, 김영삼 대통령의 이 같은 담화를 기점으로 IMF의 관리를 받게 됐다. 경제 체질을 바꾸기 위해 속도감 있는 김대중정부 정책도 주효했지만 위기 때마다 보여줬던 국민의 응집력이 빛을 발했다. 국민의 자발적인 금모으기 운동은 구한말 국채보상운동에 견줄 정도로 ‘애국적 참여운동’으로 평가됐다. 1997년 11월20일 새마을운동 단체 중 하나인 ‘새마을부녀회 중앙연합회’의 ‘애국가락지 모으기 운동’이 시초가 됐다. 비상경제대책추진위에서 보고된 뒤 전국적으로 금 모으기 운동이 확산됐고 2개월여 만에 227t의 금이 모아졌다.

외환위기를 극복한 한국은 철강과 자동차, 반도체, 가전제품 등에서 세계적 경쟁력을 갖추게 됐다. 특히 반도체와 휴대폰 등 정보통신 분야에선 압도적인 경쟁력으로 세계에서 손꼽히는 정보기술(IT) 강국이 됐다. 이제 한국 기업들은 우수한 기술과 대규모 자본을 바탕으로 전 세계를 누비고 있다.

김용출 기자 kimgija@segye.com

[ⓒ 세계일보 & Segye.com,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Menu

Kollo 를 통해 내 지역 속보, 범죄 뉴스, 비즈니스 뉴스, 스포츠 업데이트 및 한국 헤드라인을 휴대폰으로 직접 확인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