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영은의 <먼 그대>는 여성이 가부장적 남성 질서와 맺는 관계가 ‘굴종과 저항’, ‘종속과 해방’의 이분법적 틀로 단순화될 수 없는 기이한 도착성을 띨 수 있다는 점을 우리에게 알려주는 흔치 않은 소설이다. 1970~1980년대 초남성적 권위주의 국가에 의해 억압적 근대화가 진행돼 온 한국사회에서 국민은 남녀를 가릴 것 없이 사회적으로 거세된 존재나 다름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남성들은 억압적 정치체제를 무기력하게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던 사회적 거세를 부인하기 위해 더욱 강한 남성성으로 재무장하고자 했으며, 여성들은 그 남성성을 보조하는 수동적 위치에 머무는 것 이외에 다른 선택지를 찾을 수 없는 것처럼 보였다. 물론 여성이 남성 질서에 맞서 싸우는 투쟁의 방식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당시 한국사회에서 소수의 해방투사를 제외한 다수의 여성에게 직접 투쟁의 길은 크게 열려 있지 않았다. 이런 사회적 조건에서 서영은 소설의 여성 인물은 마조히즘이라는 우회로를 선택한다.
남성 질서 전복 전략 여성의 마조히즘서 찾아
이 도착적 우회로가 열어주는 위반의 가능성을 1983년이라는 비교적 이른 시기에 실험했다는 점에서 <먼 그대>는 새로이 해석될 필요가 있다. 1983년은 광주의 민중 봉기를 폭압적으로 제압한 초남성 군부독재 체제에 의해 숨조차 쉬기 어려운 시절이었다. 서영은의 <먼 그대>는 초남성 권위주의 질서가 사회 전체를 물 샐 틈 없이 통제하던 당시, 이 질서를 역전시킬 가능한 전략을 여성의 마조히즘에서 찾는 도발적 상상력을 선보인다.
여성의 마조히즘에 ‘도발적’이라는 표현을 쓰는 것이 의아하게 느껴질 수 있다. 마조히즘은 자율적 주체가 되기 위해 여성이 극구 피해야 할 어떤 것으로 이해되고 있기 때문이다. 흔히 마조히즘은 사디즘의 보완 형태로 인식된다. 사디스트가 주체의 힘과 권능을 확인하기 위해 타자를 지배하고 파괴하는 것에서 쾌감을 얻는다면, 마조히스트는 주체의 힘과 자율성을 축소하고 타자에게 복종함으로써 피학적 고통을 즐긴다는 해석이 그것이다. 사디즘이 수행되려면 마조히즘이 그것을 뒷받침해야 한다. 더욱이 양자에 각기 남성과 여성이라는 젠더가 부과되면 ‘사디즘=남성=지배’, ‘마조히즘=여성=복종’이라는 논리가 자연스럽게 정당화된다. 이런 까닭에 많은 페미니스트는 여성과 마조히즘을 연결하는 논의에 불쾌감을 표시하며 저항해왔다.
그러나 이런 해석과 달리 마조히즘을 사디즘에서 분리해 그 자체로 규범적 남성 질서에 도전하는 전복적 태도로 읽어내는 시도가 있다. 마조히즘에 대한 들뢰즈의 해석에 따르면, 남성 마조히스트는 자발적으로 여성에게서 채찍질을 당하는 복종적 역할을 수행함으로써 자기 안의 아버지를 매질하고 기존의 규범 질서가 만들어낸 남성이 아닌 새로운 존재로 자신을 변형시킨다. 여성에게 매질 당하는 처벌의 고통은 새로운 존재로 변형된 뒤 향유하게 될 욕망을 위해 치러야 하는 대가다. 그런데 이는 여성적 역할을 전유함으로써 남성 질서에 맞서는 남성 마조히스트에 해당하는 논리다. 들뢰즈에게는 여성 마조히스트를 설명할 논거가 마련돼 있지 않다.
그렇다면 남성 마조히즘과 달리 여성 마조히즘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우리는 여기서 ‘여성이 남성 질서에 수동적으로 예속되는 것’과 ‘여성 마조히즘’을 범주적으로 구분할 필요가 있다. 표면적으로 비슷해 보이지만 둘 사이엔 차이가 있다. 여성 마조히즘은 여성이 억압적 아버지의 역할을 하는 남성과 계약을 맺고 죄의식 없이 규범이 원하는 수동적 역할을 연기함으로써 저항을 이뤄낼 가능성이 열려 있는 심적 태도다. 여성 마조히즘은 가부장적 시스템이 소진되는 지점까지 그 시스템을 가동함으로써 스스로 작동을 멈추게 하는 방식이다. 여기서 남성이 여성을 착취하는 가학적 역할을 수행하면 할수록 그는 힘이 증대하는 것이 아니라 점점 더 찌질하고 우스꽝스러운 존재가 된다. 반면 착취당하는 수동적 역할을 하는 것처럼 보이는, 혹은 그렇게 연기하는 여성은 점점 더 힘이 세지고 관계의 주도권을 잡는 이상한 역전이 일어난다. 여기서 복종적 역할을 (연기)하는 여성은 그야말로 남성에게 예속된 수동적 존재가 아니다. 그는 자신의 욕망을 포기하지 않고 그것을 즐기는 존재로 변형된다. 우리가 <먼 그대>에서 만나는 것이 이처럼 역전된 상황이다.

20년 후 그 뒤를 이은 한강의 ‘채식주의자 여성’
<먼 그대>의 여주인공인 문자는 별 볼 일 없는 출판사에서 교정일을 보는 가난한 여성이다. 나이 어린 출판사 직원들에게 그는 선배라기보다는 초라하고 비루한 노처녀에 지나지 않는다. 그들은 자신들이 하기 싫은 일을 그에게 떠넘기고 노골적으로 따돌리기까지 한다. 문자는 출판사에서는 노처녀로 알려져 있지만, 실은 한수라는 기혼 남자와 불륜 관계를 맺고 그와의 사이에 아들을 두고 있다. 그 아들은 한수에게 빼앗겨 한수의 집에서 길러지고 있다. 불륜의 관계에 있지만, 한수가 문자를 보살피거나 경제적으로 지원하는 것은 아니다. 한수는 한때는 유력한 여당 소속 국회의원의 비서라는 그럴싸한 직업을 가지고 있었고 광산업을 하면서 재산을 불리기도 했지만, 지금은 영락한 신세다. 계엄령이 선포되고 국회와 내각이 해체되면서 사업이 기울어 이제 그는 수시로 문자에게 돈을 뜯어 가는 비루한 처지가 됐다. 그러면서도 그는 늘 당당하다. 그는 문자에게서 뭔가를 얻어내고 문자를 착취하는 데 이골이 났다. 그러나 문자는 그런 한수에게 아무런 요구를 하지 않고 한결같은 마음으로 보살핀다. 심지어 아들을 되찾아오려는 시도도 포기한다. 그렇다고 문자가 한수의 이기심을 모르는 것은 아니다. 문자는 한수의 마음이 무디고 이기적이라는 것을 일찌감치 간파하고 있다.
문자는 왜 이런 예속적 관계를 지속하는 것일까? 왜 한수에게 착취당하는 고통을 감수하는가? 문자가 착취 관계에 맞서거나 그 관계를 떠나지 않는 것은 주체로 서지 못하는 노예 심리에 빠졌기 때문인가? 그러나 작품에서 문자는 노예가 아니라 주인으로 그려진다. 관계의 어느 순간 한수는 그에게 “무관한 존재”가 됐다. 문자에게 한수는 “이미 한 남자라기보다는 그녀에게 더 한층 시련을 주기 위해 더 높은 곳으로 멀어지는 신의 등불처럼 여겨지는 존재일 뿐이다.” 한수는 문자가 스스로 설정한 이 등불에 이르기 위한 사다리에 지나지 않는다. 한수가 문자에게 고통을 가할수록 문자는 자신 안에 더 큰 힘이 솟구치는 것을 느낀다.
“한수는 그녀에게 천 개의 흉터를 내었을 뿐, 그녀가 그 흉터를 스스로 딛고 일어선 지금에 이르러서 그는 이미 그녀의 맘속으로부터 지나간 그 무엇이었다. 그가 무자비한 칼처럼 그녀에게 낸 상처 하나하나를 딛고 일어설 때마다, 문자의 정신은 마치 짐을 얹고 또 얹고 그러는 동안 자기 속에서 그 짐을 이기는 영원한 힘을 이끌어낸 불사(不死)의 낙타 같았다.”
“불사의 낙타”가 지향하는 세계는 사막의 율법에 구속당하지 않는 초월적 세계다. 작품에서 사막으로 표상되는 현실 세계는 남성적 가치와 율법이 지배하는 세상이다. 이 세상에서 문자는 1000개의 흉터로 너덜너덜해지고 무거운 짐을 짊어진 비천한 존재지만, 그에 굴하지 않고 자기만의 윤리를 창조한다. 낙타가 갈증을 견딜 수 없는 마지막 순간에 자기 등의 굳기름을 물로 바꾸듯이, 문자는 자기 안에서 자기만의 윤리를 창조함으로써 사막을 건너간다. 굴욕의 비수를 꽂는 남자와의 관계를 역전시켜 남자가 건드릴 수 없는 생의 욕망을 실현한다. 문자가 당하는 고통은 이 욕망을 실현하기 위한 예비적 단계일 뿐이다. 굴욕당하는 마조히스트 여성은 실상 자신의 욕망을 가차 없이 실현하고 있다. 이것은 현실을 외면하는 정신 승리법이 아니다. 그것은 사막의 현실을 내파하는 일인칭 레지스탕스 윤리다. 나는 이 레지스탕스 윤리를 실천하는 또 다른 인물을 20년 뒤 한강의 ‘채식주의자 여성’에게서 본다. 그렇게 시간을 건너뛰어 여성문학은 이어진다.
![[북스&] 20세기 철학의 흐름을 바꾼 여성들](https://newsimg.sedaily.com/2025/11/28/2H0MPQT692_1.jpg)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