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도체 산업을 키우기 위해선 정부가 자국 기업에 직접 보조금을 지급해야 하는 것일까. 최근 정부와 국회, 나아가 한국 사회 전체의 뜨거운 쟁점이 되고 있는 사안이다. 특히 한국 반도체 산업의 상징인 삼성전자 위기가 가시화되면서 보조금 지급 관련 논쟁은 더욱 치열해지고 있다.
현 정부는 수차례 반도체 지원 방안을 발표했지만 직접 보조금 지급은 빠졌다. 과거 정부들도 마찬가지였다. 윤석열 정부가 지난달 27일 내놓은 ‘반도체 생태계 지원 강화 방안’도 인프라 구축 지원, 투자세액 공제율 상향, 정책금융 공급이 골자였다. 정부는 보조금을 직접 지급하는 것에 여전히 소극적인 입장이다. 한 반도체 업계 관계자는 기자와 통화화면서 “정부가 세수 문제 때문에 반대 입장을 고수하고 있다”고 전했다. 특히 기획재정부가 완강하게 반대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렇다 보니 반도체특별법을 논의 중인 국회에 관심이 쏠린다. 여야를 막론하고 보조금 지급을 명시한 법안이 국회에 제출돼 있다. 국민의힘은 지난달 11일 보조금을 지원할 수 있는 근거 조항이 포함된 반도체특별법을 당론으로 발의했다. 더불어민주당은 재정 지원에는 원칙적으로 찬성하지만 ‘보조금’이란 용어를 법안에 명시적으로 넣을지에 대해서는 조심스러운 입장이다. 반도체 보조금을 둘러싼 몇 가지 쟁점을 정리했다.
보조금을 지급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이들의 강력한 근거는 주요국들이 이미 보조금을 지급하고 있다는 것이다. 미국 정부는 2022년 반도체과학법(칩스법)을 제정해 인텔에 85억달러(약 11조4000억원) 보조금을 투입했다. 중국은 지난해 자국 대표 파운드리(반도체 위탁 생산) 기업 SMIC에 2억7000만달러(약 3600억원) 규모의 보조금을 지급했다. 일본 정부도 자국 연합 반도체 기업인 라피더스 설립에 63억달러(약 8조5000억원) 보조금을 투입했다.
이윤호 전 지식경제부 장관은 지난 10월14일 한국경제인협회 주최 토론회에서 “반도체 산업에 대한 지원을 단순히 개별 기업에 대한 혜택으로 봐서는 안 된다”며 “미국, 중국, 일본이 막대한 보조금 지원을 결정한 것은 반도체가 단순한 산업을 넘어 국가 경쟁력과 직결되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보조금 신중론자들은 보조금을 지급하는 나라들과 한국의 반도체 산업 지형이 다르다는 의견을 제시한다. 미국, 일본은 주로 반도체 생산시설 자국 유치를 위해 보조금을 지급하고 있다. 그런데 한국은 반도체 생산시설이 이미 충분히 있다. 글로벌 반도체 공급망에서 핵심 제조기지 역할을 하는 대만도 보조금을 지급하지 않는다. 대신 한국과 대만은 연구·개발(R&D) 비용이나 시설 투자에 대한 세액공제 지원에 집중하고 있다.
이에 대해 안기현 한국반도체산업협회 전무는 통화에서 “제조 시설에 대한 투자 경쟁을 과거에는 한국과 대만만 했지만 지금은 전 세계가 하고 있고, 그래서 적기에 투자하는 게 유리하다”며 “세액공제는 투자해야 사후적으로 지원을 해주는 것이라서 업황이 안 좋은 기업이 선제적으로 투자하게 하려면 보조금을 줘야 한다”고 말했다. 삼성전자 사장 출신 고동진 국민의힘 의원은 자료를 내고 “미국이 기존 제조기반이 구축돼 있어도 추가로 직접 보조금을 지원하는 것은 속도 측면에서 자국 회사들의 반도체 생산능력과 공급망을 강화하고자 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한국의 보조금 직접 지급이 세계무역기구(WTO)나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보조금 규정 위반이냐는 논란도 쟁점이다. 2001년 SK하이닉스가 현대전자 시절 산업은행의 구제금융을 받자 미국이 WTO 협정 위반이라고 지적하며 고율의 상계관세를 부과했다. WTO는 공정무역을 방해하는 보조금을 금지하고 있다. 반면 WTO 체제가 유명무실화됐고, 주요국들이 보조금 지급 경쟁에 나서면서 반도체 분야의 글로벌 규범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는 반론도 있다. 또 다른 업계 관계자는 “남의 국가 보조금만 문제라는 식의 내로남불이 횡행하면서 WTO 규정은 식물화된 지 오래”라며 “미국 정부가 이를 문제삼을 것이란 주장은 기우”라고 말했다.
국회 산업통상자원중소벤처기업위원회 야당 간사인 김원이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여야 모두 보조금 조항을 넣었으면 하는 생각인데 과거 미국에 두들겨 맞은 경험 때문인지 정부가 반대하고 있다”며 “보조금이란 표현을 사용해 논란을 자초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 산업통상자원부와 기재부의 생각”이라고 말했다. 김 의원은 “징벌적 관세까지 거론하는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당선인이 앞으로 어떻게 나올지 알 수 없는 상황”이라며 “수출주도형 국가인 우리가 맞설 힘이 있느냐. 경제력이나 대미 협상력을 고려할 때 (예상되는 보조금 관련 논란을) 피해갈 방법을 찾아야 하는 문제가 있다”고 설명했다.
근본적으로 보조금 지급 여부와 한국 반도체 경쟁력 제고의 관련성에 대한 논란도 있다. 예를 들어 지금 삼성전자의 경쟁력 하락이 자본력의 문제는 아니라는 주장이다. 박상인 서울대 행정대학원 교수(경제학)는 “삼성전자나 SK하이닉스가 돈이 없어서 투자를 못하는 게 아니지 않느냐”며 “삼성전자가 고대역폭메모리(HBM)에서 밀리고, 파운드리도 고전을 하는 게 보조금을 안 줘서 생긴 문제가 아니지 않느냐”고 말했다. 박 교수는 “전략적 의사 결정 실패와 리더십이 문제인데 이를 보조금 문제로 치환해서 사안의 본질을 흐리고 있다”며 “세금으로 보조금을 주면 성과를 내기보다는 정부에 의존하게 만드는 도덕적 해이만 생길 것”이라고 말했다.
최상목 부총리 겸 기재부 장관도 지난 9월25일 관훈클럽 초청 토론회에서 “특정 대기업이 정부의 직접 보조금을 원하고 (보조금을 줘야) 대기업 경쟁력을 높일 수 있다는 전제 같은데,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고 언급한 바 있다.
이에 대해 고 의원은 “직접 보조금의 핵심은 중소 및 중견 기업과 벤처 스타트업 및 소부장(소재·부품·장비) 기업 등 반도체 산업 생태계를 활성화하고자 하는 것”이라며 “소부장 업체들의 국산화율에 따라, 해당 소부장 업체와 이를 채택하는 기업에 보조금이라는 수단을 지원하면 생태계가 살아날 수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