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워 인터뷰 | 도올 김용옥, 계엄과 탄핵 이후 시대정신을 논하다
“尹의 비상계엄 실패는 역사의 천명, 탄핵반대 집회 인원 숫자에 혼동 말아야”
“보수 대권후보 유승민 제외하면 ‘원죄’ 있어, 국민의힘은 디테일 좇다 상식 잃어”
“민주당 이재명 일극체제는 오히려 확고한 리더십 증거, 明 지지 표명한 적 없어”
“트럼프 당선으로 仁義에서 利로 미국 옮겨가, 중국은 우리가 영원히 관계할 상대”
대중적 지식인은 형용모순처럼 들린다. 문학·역사·철학에 기반한 지식이 대중의 흥미를 돋우기란 어렵기 때문이다. 여기서 도올 김용옥(77) 선생은 지식이라는 광맥을 불특정 다수에게 연결하는데 성공한 극소수에 해당한다. 그 비결은 흡입력이다.
동서양 고전과 철학, 종교의 에센스를 추출해 작금의 시대정신을 설명하는 그의 화술은 일종의 인문학 토크 콘서트나 다름없다. 목소리, 제스처, 패션까지 도올의 아우라는 ‘압도적 인간’이 내뿜는 감화력을 발산한다.
2월 12일 종로구 동숭동 그의 작업실에서 만났을 때, 도올은 심한 독감에 걸려 있었다. 하지만 막상 대화가 시작되자 두 시간 가까이 지친 기색 없이 열변을 토해냈다. 마주 앉은 책상 뒤편 도올의 서재는 정리되지 않은 책더미였다. 동학 교주 최시형부터 종로 주먹 김두한까지, 도스토옙스키부터 불경까지, 이탈리아 기호학자 움베르토 에코의 소설 〈장미의 이름〉에 나오는 중세 수도원의 대도서관 같은 방대한 세계였다.
구석에는 피아노가 있었다. 동석한 남호섭 통나무출판사 대표는 “선생님이 최근 재즈 피아노를 배우고 계신다”고 말했다. 이런 르네상스적 인간이 12·3 계엄과 그 이후 펼쳐진 초현실적 혼돈을 어떻게 바라보고 있는지 듣고 싶었기에 성사된 인터뷰였다.
흔히 세상은 도올을 ‘진보의 어른’으로 인식한다. 하지만 도올은 ‘자유시 참변’처럼 대한민국 진보 세력이 금기시하는 영역도 거침없이 발언했다. 계엄 직후 탄핵 정국을 목도하며 탈고한 〈상식〉에서도 그는 ‘상식과 비상식의 대립 구도’로 현 상황을 파악하고 있었다. 그리고 상식을 복원하는 힘은 국민으로부터 나올 것이라고 믿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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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군인들의 차마 그러지 못한 마음 기억해야”
계엄의 밤을 어떻게 지냈나?
“〈시경〉을 번역하고 있었다. 후배가 ”선생님, 피하셔야 하는 것 아니냐“고 놀라서 전화를 해와 알게 됐다. 그 후배는 나를 김어준 같은 ‘문제적 인물’이라고 생각해서 그랬겠지만, 나는 처음에 그저 황당했다. 왜냐하면 헌법에 지식이 있는 사람이라면 알겠지만, 비상계엄은 경비계엄과 다르다. 무엇인가 쳐들어 왔다든지 긴박한 사태가 발생했을 때 발하는 것이다. 하지만 일상적으로 아무 문제가 없는 상황에서 계엄령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비상계엄 자체가 성립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예방을 전제로 계엄을 발동한다면 세계 정치가 다 망가질 것이다.”
〈상식〉에서 계엄령 해제를 위해 국회로 달려간 시민들을 극찬했다.
“5·18 광주항쟁과 비교해보면, 그때는 전두환이라는 사람의 메시지에 의해 전군이 움직일 만한 태세, 즉 인적 네트워크를 갖추고 있었다. 당시 광주에 들어간 공수부대도 거의 세뇌당한 상태로 갔기 때문에 인간다운 판단을 할 여지도 없었다. 이에 비해 ‘여의도 사태’는 황당하다. 평화로운 국회, 평범한 시민들의 여의도였다. 상식 있는 사람이라면 이런 상황에서 누가 움직이겠나. 맹자가 한 유명한 이야기가 있다. 멀쩡한 사람을 칼로 찌르고 ‘이것은 내가 찌른 게 아니라 칼이 찌른 것이니 나는 죄가 없다’고 하는 것은 폭군이 국민을 바라보는 자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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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회로 출동한 군인들이 자제한 덕분에 유혈 사태로 번지지 않았다.
“나 역시 무술을 해본 사람이다. 무술 하는 사람은 최소한의 인격 수련이 돼 있다. 그러니까 멀쩡한 사람을 칼로 찌를 생각은 도저히 하지 못하는 것이다. 불인인지심(不忍人之心), 사람이기 때문에 차마 행동하지 못하는 마음이 있었던 것이다. 그 자리에서 드러난 시민과 군인들의 감정 교류는 고조선 이래 우리가 이 나라를 지키면서 쌓은 상식, 도덕, 차마 하지 못하는 마음이 표현된 우리 역사의 본체였다.”
“尹의 ‘자유’는 도덕을 무시한 시장의 자유”
왜 12·3 계엄 사태 이후 펴낸 책 제목을 〈상식〉이라고 정했나?
“나는 헤겔이나 칸트 같은 계몽주의 철학자들과 방법이 다르다. 나는 구체적으로 역사 속에서 철학을 논한다. 이 책은 우리가 살아온 역사 속에서 ‘상식’이 과연 무엇을 의미하는지 제시하는 것이기 때문에 책 속에 반만년간 쌓아온 한국 역사 전체가 녹아 있다.”
책을 보면 “민중의 승리를 역(易)은 천명이라 표현한다”고 나와 있다. 그렇다면 계엄의 실패는 필연이자 천명인가?
“그렇다. 역사라는 거울을 가지고 사는 상식인이라면, 매일 밤 술을 마신다는 윤석열이라는 사람이 국민을 향해 계엄을 발표했을 때, ‘이것이 온전한 짓인지’ 생각했을 것이다. 그 뒤 국회로 결집한 사람들은 ‘마가복음’에 나오는 예수의 행적처럼 유티스(그리스어로 ‘즉시’라는 뜻), 곧바로 움직였다. 이재명 민주당 대표도 ‘제가 국회로 가고 있는데 혼자 힘으로는 막을 수 없고 국민의 호응이 있어야 저지할 수 있기에 국회로 모여 달라’고 호소했다. 그 호소에 놀라운 진실이 있었고, 사람들이 모였고, 혼연일체가 되어 결국 계엄을 막을 수 있었다. 맹자는 ‘천명이 하늘의 신비한 곳에서 소리라도 내려오는 줄 아는가. 천명은 곧 민심’이라고 했다.“
윤석열 대통령 취임 초기부터 선생은 “아무리 극우적인 사상을 갖고 있어도 대통령은 모든 걸 포용해서 말을 내비쳐도 점잖게 해야 한다”, “경제와 안보 위기 등 보통 심각한 것이 아닌데 너무 무능하고 무책임하고 실력이 없다”고 일갈했다.
“대통령이라면 대통령답게 말하고 행동하며 정책을 짜야 한다. 그런데 인사부터 독립기념관장, 한국학중앙연구원장, 국사편찬위원회 위원장,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 위원장, 동북아역사재단 이사장 등에 앉히면 안 되는 친일 논란 인사들을 우선적으로 임명하더라. 여기서부터 이 정권의 미래는 없다고 느꼈다. 지금 독립기념관이 있는 천안시 목천읍이 내가 자라며 맨날 냇가에서 붕어 잡던 곳이다. 그리고 R&D 예산을 깎았다. 이는 민족의 미래를돌보지 않겠다는 이야기나 똑같다. 상식적으로 판단해보면, 이 정권이 ‘막가파’로 가는 것의 시그널을 계엄 전부터 읽을 수 있었다.”
이를 테면 무엇인가?
“의료개혁은 의사들과 싸우겠다는 말이나 다름없다. 전 세계인이 우리나라 의료 체계에 대해 ”굉장히 효율적인 서비스를 제공한다“고 평가한다. 상당히 사회주의적 정책인 캐나다보다도 훨씬 사회주의적 배려와 자본주의적 현실을 잘 배합해서 작동하게만들었다. 이를 이토록 무자비하게 바꾸려는 내면에는 ‘의료 체계를 흔들어 의사들의 특권을 공격하면 민심을 얻는다’는 생각이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여기를 건드리면서 우리나라가 엄청 불안해졌다. 당장 의료 서비스를 못 받고 응급실이 안 돌아간다. 그 궁극적 배경에는 의료 체계를 사유화하려는 사람들의 조작이 들어 있다고 생각한다.”
이제 와서 보면 윤 대통령의 정치적 협상력, 민주주의에 대한 이해 자체에 관한 근본적 의구심이 든다.
“계엄령으로 일거에 다 해결할 수 있다는 생각이 존재했다니, 정말 말도 안 되는 판타지 속에 사로잡혀 있었던 듯하다. 헌법재판소에 나와서 말하는 것을 보면 더욱 그런 확신이 든다.”
윤 대통령이 시종일관 강조한 ‘자유’와 도올 선생의 ‘자유’ 사이에는 꽤 큰 간극이 존재하는 것 같다.
“전혀 다르다. 원래 자유는 서구적 개념에서 출발했다. 서양 역사의 자유는 불합리한 종교적 억압에서 벗어나는 것이었다. Freedom 자체가 Free+From, 즉 무언가로부터 벗어난다는 뜻이다. 중요한 것은 그 벗어난 상태를 어떻게 유지하느냐다. 그래서 나는 자유를 자율이라고 항상 이야기한다. 사실 정치에서 자유라는 것은 없다. 대통령이든 왕이든 자유로운 인간이 아니라, 국가 질서와 합치되는 자신의 삶을 자율적으로 컨트롤하며 사는 것이 중요하다. 서양인들은 아직도 동양인의 자유가 자율이라는 개념을 이해하지 못한다. 불경에서 가장 본질적인 장(章)이 율장이다. 스스로 자기를 규제하는 것이 해탈이자, 궁극적인 인간 세상의 목표다. 하지만 이 사람(윤 대통령)은 그런 것들을 모른 채 자유를 외친다. 과거 우리나라 친일파 세력이 항상 자유민주주의를 외쳤다. 그 자유가 얼마나 천박했겠나.”
윤 대통령의 자유는 ‘시장의 자유’ 개념이 강한 것 아닌가?
“그렇다. 시장의 자유 자체가 도덕을 무시한다. 프랑크푸르트학파(마르크스주의적 성격을 띤 사회이론가 집단을 지칭. 에리히 프롬, 발터 벤야민, 위르겐 하버마스 등을 포함)의 논의가 있었듯이 시장의 자유는 근대사회의 체제를 붕괴시키는 이론이다.”
“헌법재판소 판결은 우리나라 헌법 상식에 속해”
문재인 전 대통령이 “윤석열의 검찰총장 임명을 후회한다”고 말하며 사과했다.
“적시에 나온 발언이라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문 전 대통령이 입만 닫고 있어선 안 되는 입장이었다. 아무도 문 대통령을 비판하지 않을 때, 내가 소위 ‘문빠(문 전 대통령의 팬덤) 정치’에 관해 분노를 표출한 적은 있다. 문 전 대통령이 ”임기 동안 문빠 소리 듣는 (내 편만 챙기는) 정치는 하지 않겠으니 (문빠들도) 자제해달라“고 했으면 우리나라가 지금 이렇게 가지 않을 수도 있었다. 다만 윤석열의 폭정에 문재인의 책임이 있다는 식으로 연결하면 안 된다. 나의 문재인 비판은 문 대통령 임기 초기에 문빠 같은 것에 의존해서 정치하면 안 된다는 얘기였지, 지금 윤석열의 문제와 연결하면 부당하다. 이것이 민주당의 분열로 흘러가면 안 된다. 역사는 정확하게 책임을 묻되, 그 책임은 어디까지나 문재인의 정치 역정에 있어서의 한도 내에서 이야기해야 한다.”
대구에 5만 명이 넘는 탄핵 반대 집회 인원이 모였다고 한다. 여론이 양쪽으로 결집하는 모양새인데 정말로 탄핵이 될까?
“심판 과정이 길어질수록 소위 우파들이 준동하는 것처럼 보일 수 있는 현상이 많이 나타날 수밖에 없다. 지금과 같은 혼란기에, 아무런 리더십이 없는 상황에서, 소위 보수우파가 결집해 사회적 세력을 형성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이는 명백히 보수와 진보혹은 좌와 우의 대결이 아니라 근원적으로 상식과 비상식의 대결이다. 그리고 현재 벌어지고 있는 모든 사태에 대한 판단은 국민의 상식에 달린 것이다.”
“이재명의 언행과 정책, 상궤를 벗어나는 것 없어”
이 과정에서 법원이나 헌법재판소의 공정성이나 권위마저 의심받고 있다.
“나라가 아무리 흔들려도 우리나라의 법 질서, 법관들이 그렇게 유치한 사람들이 아니다. ‘(검찰 조사에 따르면) 국민을 향해 발포를 명령하고, 국회의원들을 모조리 잡아들이라’고 난동을 부린 사람을 다시 대통령에 앉혀서 국민이 그를 모시고 앞으로 몇 년을 살겠다? 이런 꿈을 꾸는 사람이 얼마나 되겠나? (목소리가 올라가며) 이미 윤석열은 끝난 존재다. (윤 대통령을 옹호하는) 나머지들은 이 사태를 활용해 돈을 벌고, 국회의원 자리 한 번 더 하고, 정치적 역량을 얼마나 늘릴지 고민하는 부류들이다. 국민 다수가 윤석열을 지지하는 것처럼 착각하지 않아도 된다. 헌법재판소의 판결은 우리나라 헌법 상식에 속하는 문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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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정치권은 탄핵 인용을 전제로 조기 대선 셈법으로 분주하다. 특히 활로를 찾아야 할 보수 진영에선 오세훈 서울시장, 김문수 고용노동부 장관, 홍준표 대구시장, 원희룡 전 국토교통부 장관, 유승민 전 의원, 이준석 개혁신당 의원 등의 이름이 거론된다.
“여기서 윤석열 정권 동안 그래도 비판적 견해를 낸 사람은 유승민과 이준석 두 명뿐이다. 하지만 이준석은 당 대표로서 윤석열을 대통령으로 만든 장본인이니 원죄가 있다. 이를 해결 못 하면 국민에게 어필할 수 없다. 다른 사람들은 일종의 부역자들이었지, 독자적 판단을 한 적이 없다. 단지 유승민 한 사람만 내가 보기에는 상식적이고 비판적인 시각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유 전 의원이 보수 진영 단일 후보가 될 수 있을지.
“지금 보수 세력에서 추구하는 것은 결국 ‘어떻게 이재명을 죽이느냐’다. 이재명이 (사법 리스크로) 허망하게 탈락하길 원하는 모양이지만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우리 사회에서 ‘이재명이 꼭 당선돼야 한다’는 메시지를 함부로 낼 사람은 거의 없다. 단지다음 대통령은 윤석열같이 황당한 인간이 아닌, 정상적 판단력을 가지고 우리나라를 이끌어주길 바랄 뿐이다. 이 사태에 대해 당당하게 자기 정견을 발표하고 국민의 마음을 얻으려 해야 한다.”
국민의힘은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 때와는 사뭇 다르게 움직이고 있다.
“박근혜 탄핵 때에는 거리를 둬서 당이 살았다. 지금은 이미 역사의 사형 선고가 내려진 윤석열의 꽁무니를 붙잡고 같이 가겠다는 것이다. ‘우파 세력이 확장돼 우리가 역사를 차지할 수 있겠다’는 이런 미치광이 같은 판단력을 가지고 어떻게 당을 이끌겠나. 너무 명백한 것을 명백하게 바라보지 못하고 있다. 정치를 디테일하게 쫓아가면 상식을 잃는다. 변화가 오면 대세를 봐야 한다. 우리 역사를 믿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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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 이재명 민주당 대표를 두고 “하늘이 내린 사람”이라고 평한 적이 있다. 또 〈상식〉에서 민주당의 총선 공천에 대해 “당원들의 결속력이 강화됐다”고 칭찬했다.
“이 대표가 지난 대선 직전, 내 연구실을 방문한 적이 있다. 우리나라 농촌이 죽어가는데 관심 갖는 이가 적어서 ‘농산어촌개벽대행진’을 진행했을 때였다. 이 대표가 여러 법률적 문제로 공판에 걸려서 정치 생명이 끝날지도 모르는 시기마다 기적적으로 정치를 계속할 수 있는 법원 판결이 내려졌다. 죽을 뻔한 사람이 대선에 뛸 수 있게 된 데 대해 ‘천명이다. 하늘이 내린 사람’이라고 표현한 것이다. 그런데 언론에서 ‘도올이 이재명을 지지한다’고 보도했다. 나는 특정인을 지지하는 사람이 아니다. 사상가로서 모든 정치인에 대해 항상 비판적 시각을 유지한다. 비판 능력이 없으면 철학이 아니다. 다만 그 뒤로도 이재명을 세밀하게 관찰했다. 언행과 정책에 있어서 상궤를 벗어나는 것이 없었다. 그렇기에 총선과 계엄을 거쳐 여기(차기 대권 주자)까지 오게 된 것이다.”
하지만 이재명 일극체제에서 ‘민주당에 민주가 없다’는 지적도 끊이지 않는다.
“그 사람의 리더십으로 북두칠성처럼 빛나는 일극 체제라면 오히려 좋다고 본다. 언론계에서 자꾸 이재명을 짓누르기 위해 일극체제라고 하지만 그만큼 리더십이 확고하다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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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정치가 갈수록 팬덤화·양극화·진영화하고 있다. 중도는 갈수록 협소해지고 있다.
“〈중용〉 강의에서 말했지만, 중용은 일직선의 가운데가 아니다. 원판 접시를 돌리는 가장 가운데 점 같은 것이다. 좌파와 우파는 가짜다. 진짜는 진리와 비진리의 문제다. 상식과 비상식의 문제다. 어떠한 경우에도 진보와 보수는 역사에 항상 존재해왔다. 공존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그러니 보수와 진보가 아니라 상식과 비상식을 기준으로 역사를 말해야 한다. 우파 집회에 몇만 명이 모였다고 해도, 상식적 환경을 만나면 결국 다 돌아간다. 자유시 참변도 이념 문제라기보다 소통이 안 돼서 생긴 비극이었다. 〈주역〉에서는 소통을 변통이라고 한다. 어떻게 사람들이 서로 소통하며, 역사를 진리의 길로 나아가게 만들 수 있는지가 나의 관심사다.”
“개헌? 역사는 어차피 변한다”
〈상식〉에서 ‘경상도 콘크리트 보수’를 다뤘다. 한국 정치에서 지역주의는 아주 오랜 갈등선이었다.
“경상도를 콘크리트 보수처럼 행동하게 만든 역사적 환경 탓이다. 역사적 배후를 살펴보면, 사실 우리나라 주요 좌파들은 경상도에서 나왔다. 일제강점기 안동 지역 부자들이 99칸 집을 버리고 북간도, 서간도로 이주했다. 신흥무관학교도 세웠다. 1946년 대구항쟁은 여순항쟁과 연결된다. 4·19혁명을 촉발한 김주열 열사도 마산에서 순국했다. 동학도 사실 경상도 경주에서 시작해 동해안 쪽에서 형성됐다. 해월 최시형 선생도 포항 분이다. 포항에서 해월 기념관 건립을 추진 중이다. 우리가 편견에서 벗어나게 되면 상식적 동지들을 얻을 수 있다.”
정치학계나 정치권 일각에서는 지금이야말로 87년 체제를 종식하는 개헌 적기라고 주장한다.
“서구 역사에서 만들어진 어떤 정치적 모델을 한국에 어떻게 적용시킬지 고민하는 한국 정치학의 풍토에 대해 나는 반성해야 한다고 본다. 우리는 지금의 이 틀 안에서 10대 경제 대국이 됐고, 5위 군사 대국이 됐으며, 문화 최강국이 됐다. 이러한 체제를 바꾸라는 소란을 피울 필요가 있나 싶다. 대통령 4년 중임제가 우리 국민의 삶과 무슨 관계가 있나? 또 내각제 같은 제도적 대안으로 우리 민족의 살길이 확보되는 것도 아니다. 도덕적 상식 속에서 어떻게 훌륭한 리더십이 나와 새로운 사회의 모습이 만들어지느냐가 중요하다. 역사는 어차피 변한다. 거기에 맞춰 제도적인 개혁은 서서히 이뤄지는 것이다.”
이제 글로벌 정세로 범위를 넓혀 보자. 미국은 MAGA(위대한 미국)를 모토로 내건 도널드 트럼프가 미국 대통령으로 돌아왔다. 글로벌 질서의 근본적 재편이 이뤄지고 있다.
“맹자는 ‘왜 리(利)를 말하는가. 인의(仁義)가 있을 뿐’이라고 했다. 미국이 실리 중심으로 간다면 전 세계가 자국의 이로움을 추구하고 인의를 저버리게 된다. 결국 아메리칸 드림은 사라지고 미국의 가치는 저하되는 것이다. 미국이 (소프트파워 등) 도덕적 우월성을 포기하면 남는 것은 군사력 하나다.”
“설마 중국이 추격할 줄 몰랐단 말인가?”
미·중 패권전쟁이 격화하는 와중에 한국은 중국과의 관계에도 무심할 수 없다.
“중국을 우습게 보면 안 된다. 내가 중국에서 공부했고, 중국 친구가 많으니 ‘친중’이라고 하겠지만, 중국 숭배가 아니라 ‘중국이라는 함수는 우리가 항상 가지고 살아야 하는 것’이다. 윤석열은 무슨 깡다구인지 오자마자 중국과 러시아를 잘라버리면서 한·미·일 공조에 치중했는데 완전히 우리나라를 고사시키겠다는 전략이다. 우리는 강대국들과의 지정학적 포지션을 영원히 활용하며 살아야 하는 나라다. 누가 정권을 잡아도 좋은데, 남북문제를 해결하고 일본 세력을 어느 정도 누르며 가야 한다.”
우리 안의 반중정서 이면에는 반도체·이차전지·자동차 등 주요 산업에서 중국에 추격당하고 있다는 위기감이 작용하는 듯하다.
“우리가 일본을 추격했듯 중국이 우리를 따라오는 것은 당연하다. 그동안 그들(중국)의 값싼 노동력을 활용하며 우리가 재미를 봤다. 하지만 앞으론 전략을 바꿔야 한다. 설마 추격할 줄도 모르고 기업을 했단 말인가?”
중국식 전랑외교에 대한 거부반응도 있다.
“내가 보기에 중국과 우리나라는 역사를 같이했기 때문에 그래도 설득과 소통이 가능 관계다. 일본하고는 그게 안 된다. 일본은 바다에 핵폐기물을 그냥 버리는 양심을 가진 나라다.”
한국의 주력기업인 삼성전자만 해도 활력을 잃었고, 중국 정부의 보조금으로 무장한 반도체업체의 공세에 시달리고 있다.
“삼성전자가 AI 트렌드에서 소외된 것을 두고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에 대해 사회적으로 부정적 평판이 많다. 삼성이 조금 더 정신 차리고, 여태까지 쌓은 인적 자산이나 효율적 투자로 잘 헤쳐나가길 기원할 따름이다.”
지난 대선 때 선생의 주역 점이 화제가 됐었다. 현 시점에서 대한민국의 국운은 어디쯤 와 있는가?
“주역은 점이 아니다. 주역은 개인의 운명을 다루지 않는다. 국가 사태, 사회적 운명에 대해 거북이라는 영물을 가지고 했다. 다만 주역은 길흉에 관해 분명히 이야기한다. ‘여민(與民)’, 백성과 더불어 환란을 같이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지금 흉운을 피하고 길운으로 간다는 것은 빨리 윤석열을 파면하고 끝내는 것이다. 맹자는 ‘대임(大任)을 맡길 때는 반드시 그 심지를 괴롭히고, 근골(筋骨)을 아주 피곤하게 만들고, 피부를 다 망가뜨리고, 그 몸을 아주 공핍(空乏)하게 만든다. 그러한 이유는 결국 그런 과정을 거쳐서 그동안 할 수 없었던 일까지도 내가 할 수 있도록 증강시켜주는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올해가 을사년이니 을사늑약(1905년)으로부터 두 갑자, 120년 동안 누적된 죄악을 깨끗이 씻어내기 위해 여러 문제점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는 과정이다.”
지난해 말 〈만해 한용운, 도올이 부른다〉를 썼다. 어떤 목적에서 만해를 소환한 것인가?
“올해로 일제 36년 동안 가장 순결하고 열렬하며 정확하게 지조를 지킨 만해의 시집 〈님의 침묵〉이 나온 지 꼭 100년이다. 여태까지 우리는 일제강점기 역사를 너무 궁핍하게만 바라봤다. 만해뿐 아니라 석전 스님, 조지훈 선생, 홍사용 선생, 정지용 선생의모습이 이광수나 최남선류 인물들에게 가려져서 실체를 몰랐다. 백낙청 선생, 염무웅 선생도 만해를 다시 봐야 할 시대라고 말씀하셨다. 만해를 새로이 해석하며 20세기 우리나라 역사의 대맥이 바로 서고, 우리 민족 문학사 100년이 새롭게 정리됐다.”
“지금 죽기 너무 억울하다”
재즈 피아노를 연습하고 있다고 들었다. 여든을 바라보는 나이에도 다빈치적 인간으로 살아가는 에너지의 원천은 어디에 있는가?
“어려서부터 열등감이 컸다. 막내로 태어나 ‘돌대가리’ 소리를 듣고 자랐다. 호를 도올이라고 지은 것도 돌멩이에서 온 것이다. 항상 모자라고 앎이 부족하다고 생각하니 솔직히 지금 죽기 너무 억울하다. 할일이 너무 많고, 봐야 할 책도 많고, 터득해야 할 것도 많다. 아는 만큼 보인다고 하는데, 보이는 세계는 전부 나의 무지를 일깨우는 것들이다. 무엇을 알려고 추구하고, 깨달았을 때의 희열은 지속적이며 자극적이다. 공자의 ‘기천지(己千之)’를 옛날엔 레토릭으로 알았다. 하지만 실제 재즈곡 하나조차도 최소 한 천 번은 치지 않으면 남 앞에서 연주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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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식〉에서 “인간은 허물을 향한 존재, 허물을 고치기 꺼리는 인간은 소인”이라는 대목이 있더라. 허물을 성찰할 여유조차 없는 이 시대의 젊은이들을 위한 응원을 듣고 싶다.
“〈논어〉에서 ‘돈이 벌리면 나는 무엇이라도 하겠다’고 했다. 하지만 ‘돈이 잘 안 벌릴 바에 하고 싶은 것을 하겠다’는 종오소호(從吾所好)를 말했다. 사회적인 부귀의 틀을 마련하고, 거기에 나가려는 욕망은 자크 라캉이 이야기하는 ‘대타자(大他者)의 욕망’이다. 지나친 경쟁 시스템에 내가 꼭 속해야 하고, 거기서 탈락하면 위기라고 느끼고 살지만, 그 유혹은 근거가 없는 것이다. 시스템에 희생되지 말자. 특히 서울대는 안 가도 좋다. 서울 법대를 가면 바보가 되는 것이다. 떨칠 건 떨쳐버리고 편하게 인생을 음미할 줄 아는 지혜를 배우자.”
김영준 월간중앙 취재팀장 kim.youngjoon1@joongang.co.kr
사진 최기웅 기자 choi.giung@joongang.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