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트리거 60' ㊳ 프로야구의 탄생

2025 프로야구 포스트 시즌이 시작됐다. 국내외 격변 속에서도 올해 야구에 대한 열기는 더욱 달아올랐다. 정규 시즌 역대 최다 관객인 1231만 명을 기록했다. 올해로 출범 44년째, 프로야구는 이제 남녀노소 모두 즐기는 한국인의 대표적 여가문화로 자리 잡았다. 이만한 일상의 해방구도 없다. 그 출발은 어땠을까.
1981년 9월, 서울 신라호텔. 청와대 교육문화수석 이상주, 야구해설가 이호헌, 이용일 전 대한야구협회전무 세 사람이 마주 앉았다. 서울대 상대 동문인 이용일과 이호헌은 대한야구협회에서 일한 야구 행정가였고, 이상주는 서울사범대 출신으로 이용일을 선배로 불렀다.
테이블에 놓인 A4 18쪽짜리 ‘한국 프로야구 창립 계획서’가 대화를 이끌었다. 그해 3월 출범한 제5공화국 청와대의 요청으로 이용일과 이호헌이 작성한 문서였다. 이상주 수석은 그중 지역연고제가 마음에 걸렸다. 지역의 상처를 안고 태어난 5공화국은 국민 화합을 목적으로 프로야구·프로축구 등을 계획했다. 그런데 지역을 내세운다면 자칫 지역갈등을 부추길까 우려했다. 이용일은 전문가답게 스포츠의 본질과 속성을 잘 알았다. 그는 향토애를 자극해 결국 애국심을 높이는 장치라고 설득했다. 당시 뜨거웠던 고교야구의 인기를 등에 업으려면 지역연고제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한 달 뒤, “계획대로 추진하라”는 청와대의 허락이 떨어졌다. 이용일은 프로야구단을 운영할 기업을 접촉해 6개 구단 구도를 마련했다. 1981년 12월 11일, 한국프로야구위원회 창립총회가 서울 롯데호텔에서 열렸다. 초대 총재로 전두환 대통령이 한때 상관으로 모셨던 서종철 전 육군참모총장이 추대됐다. 서슬 퍼런 군부정권과 우호적 관계를 가질 수 있는 선택이었다.
스포츠·스크린·섹스 ‘3S 정책’
정부 차원의 배려는 초기 프로스포츠 정착에 큰 몫을 했다. 전두환 대통령은 1982년 1월 20일 프로야구 구단주들을 청와대로 불렀다. 기업 총수인 구단주들에게 유럽 축구, 미국 프로야구의 예를 들어가며 해당 경기가 어떻게 국민적 이벤트로 자리 잡았는지를 설명했다. 그는 “선수들은 경기장 밖에서도 스타가 돼야 한다. 지방 구단 선수들은 (실업야구 시대처럼) 서울에 거주할 게 아니라 연고지로 이주시켜 지역 팬과 가까이서 지내야 한다”는 지침을 내렸다. 또 배석한 이규호 문교부 장관에게 “문화공보부 장관에게 얘기해 TV 중계를 적극적으로 하라”고 지시했다.

1982년 3월 27일, 서울 동대문운동장. MBC 청룡과 삼성 라이온즈의 개막전으로 한국 프로야구가 첫발을 내디뎠다. 전두환 대통령은 정장 차림에 구두를 신고 시구했다. 경기는 행운의 숫자 7대7로 맞섰고, 연장 10회말 이종도(MBC)의 끝내기 만루홈런이라는 드라마를 썼다. 대한민국 프로스포츠의 시작은 이처럼 극적이었다. 프로야구는 이후 한국 대도시들을 하나의 일정표로 묶었다. 6개 구단이 전국에서 “우리 팀 이겨라”를 외쳤고, 야구는 학교·회사·시장, 버스와 지하철에서 공용어가 됐다.

초창기 프로스포츠는 정권이 방향을 이끌었다. 그들의 3S(스크린·스포츠·섹스) 구상 속에 스포츠는 하나의 통치 도구로 여겨졌다. 그러나 그들이 던진 공이 ‘통치’ 한 방향으로만 날아가지는 않았다. 프로야구 개막전처럼 극적인 승부가 팬들을 매료시켰고, 흥이 넘치는 민족답게 뜨거운 팬덤이 그 열기를 뒷받침했다.
프로야구는 서민의 애환을 달래주었다. 야구장은 통제의 공간을 넘어 일상의 해방구가 됐고, 매일 반복되는 일상의 리듬으로 스며들었다. 프로야구 흥행은 이듬해 프로축구와 프로씨름 출범으로 이어졌다. 이후 농구·배구 등에서도 프로화가 진행됐다. 2023년 기준 한국 스포츠 전체 시장은 약 81조원으로 전년 대비 3.7% 늘었는데, 그중 프로스포츠 경기의 매출 신장세(20.6%)가 도드라졌다.

프로스포츠는 사회와 시대를 반영한다. 경제가 커지며 구단 수가 10개로 늘어났고, 1·2군 시스템도 정착됐다. ‘능력에 따른 보상’이라는 사회 전반의 프로 의식 고취에도 일조했다. 정치적 함의 또한 빼놓을 수 없다. 예컨대 5공화국은 프로야구 출범 뒤 5월 18일에는 광주에서 해태 홈경기를 편성하지 못하게 했다. 광주시민이 동요할 수도 있다는 이유에서였다. 이는 1986년 5월 18일 광주 예정 경기를 전주로 변경하도록 조정한 국군기무사 문건이 확인되면서 밝혀졌다. 해태(KIA의 전신)는 1980년대 다섯 번 우승을 차지하며 챔피언 왕조를 구축했지만, 1982~99년까지 5월 18일에는 광주 홈경기를 할 수 없었다. 해태는 그 기간 원정으로만 치러진 11번의 ‘5·18 경기’에서 9승을 거뒀다. 당시 해태 왕조의 주축인 김성한(전 KIA 감독)은 “5월 18일에는 지역민의 한을 풀어줘야 한다는 각오로 선수들이 더 진지하게 경기에 임했다”고 회고했다.

한국 프로야구는 미국 프로야구나 유럽 축구처럼 경제적 구조와 산업 인프라(중계권 등 수익기반의 구조, 구장 운영권 민간 소유 등)를 갖추고 출발하지 못했다. 정권 주도로 추진된 탓이다. 출범 당시 스포츠 구단들은 모기업 홍보의 일환이라거나 사회공헌적 가치로 그 존재 이유를 대변했다. 경영 합리화를 추진해 자생력을 갖추기 어려운 환경에도 정권의 요구로 참여하는 경우도 많았다.
프로스포츠는 이처럼 정권의 배려를 불쏘시개로 타올랐지만, 그 어떤 정책보다 큰 동력은 대중의 진심이자 팬심이었다. 직관 문화, 응원가 개사, 원정 응원, 팬클럽 등 다른 나라에서는 보기 드문 대한민국 스포츠 응원 생태계는 위로부터가 아니라 아래로부터 만들어졌다. 일례로 한국 치어리더들이 대만 프로야구팀에 속속 진출했고, 한국 프로야구를 관람하는 여행상품이 나오기도 했다.
출범 44년 만에 누적 관중 2억 돌파

반면에 문화적 가치는 자생적으로 만들어졌다. 충성도 높은 팬심이 프로스포츠를 지탱했다. 영화 ‘해운대’에서 경기장 그물에 매달려 이대호 선수를 야유하는 배우 설경구의 모습을 떠올려보시라. 이렇게 형성된 ‘프로의 시대’는 우리네 여가의 표준을 바꾸었다. 올해 프로야구는 지난 9월 11일 누적 관중 2억 명을 돌파하며 더욱 단단해진 인기를 증명했다.
한계도 있었다. 결과 위주의 순위와 성적만이 부각됐다. 프로스포츠 생태계의 다른 덕목, 예컨대 리그 운영, 중계방송 수준, 미디어, 스포츠 마케팅, 매니지먼트 등의 동반 성장이 미흡했다. 하지만 기량이 뛰어난 한국 선수들이 해외로 진출하고, 팬들도 해외 리그를 경험하면서 국내 경기의 전반적 수준도 높아졌다. 차범근·박찬호·박세리 등 해외파 1세대를 거쳐 손흥민·이정후·고진영의 시대가 열리자 팬들은 해외 선수의 기량은 물론 품성을 평가하게 됐고, 국내 프로스포츠의 기준 또한 함께 상승했다.

이제 프로스포츠는 한국인을 웃고 울리는 일상의 일부가 됐다. 손재주 많은 우리 민족은 인터넷·모바일 환경의 등장과 함께 다양한 스포츠 콘텐트·숏폼·밈 등을 공유한다. ‘직관문화’로 표현되는 관람은 여전히 ‘성지(聖地)’로 불리는 경기장에서 완성되지만 그 소비는 온라인과 모바일에서 확산된다. 음악·드라마·음식 등에서 시작된 K컬처의 글로벌 확산은 K스포츠에도 같은 가능성을 준다. 예전에 차범근(독일), 박찬호(미국), 박지성(영국)이 선수 개인으로서 해외로 진출했다면 앞으로의 K스포츠는 팀으로, 종목으로서 글로벌 소비자가 찾아오게 할 수 있을 것이다.
1982년 동대문운동장 첫 타구의 파열음과 함께 우리는 프로스포츠라는 새로운 저녁을 얻었다. 프로스포츠라는 이름의 새로운 광장이 열렸다. 서민들은 그곳에서 고단한 삶을 잠시 내려놓고, 응원하는 팀을 목청껏 외친다. 한때 신군부의 통치 도구였지만 대중이 완성한 건 관습을 흔들고 삶을 바꾸는 문화였다. 권력의 계산, 기업의 이해, 지역의 자존심, 팬의 사랑 등 그 모든 목적을 수렴하며 오늘의 프로스포츠는 되묻는다. “우리 스포츠는 문화와 전통의 산업적 가치를 추구하는가?” 트리거는 당겨졌고, 팬덤은 응답하고 있다.
창간 60주년 기획 '대한민국 트리거 60'은 아래 링크를 통해 전체 시리즈를 보실 수 있습니다.
※다음은 ‘K조선의 약진’ 편입니다.

이태일 프레인스포츠 부사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