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가 서방의 강력한 제재에도 불구하고 원전 건설과 개발도상국 자금 지원 등으로 글로벌 영향력을 확장하고 있다. 우크라이나 전쟁 초반 국제적인 고립 상태에 처했던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은 올 들어 해외 순방을 늘리며 입지를 강화하고 있다. 한편에서는 원조를 지렛대로 친(親)러시아 진영을 구축하고 다른 편에서는 건재를 과시하며 향후 정전 협상에서 유리한 위치를 차지하려는 전략으로 풀이된다.
23일(현지 시간) 파이낸셜타임스(FT)에 따르면 러시아는 현재 중국·이란·튀르키예 등 10여 개국에서 원자력발전소를 건설 중이다. 노르웨이 국제문제연구소가 발표한 러시아의 해외 원전 포트폴리오는 54개국에 달한다. FT는 “러시아는 우크라이나 침공 이후 석유 및 가스 부문이 강력한 제재에 직면했음에도 주요 원전 공급자로서의 입지를 굳혔다”고 분석했다. 전 세계적인 탈탄소 흐름은 러시아에 유리하게 작용하고 있다. 청정에너지원을 늘리려는 개도국, 데이터센터 확충에 투자 중인 인공지능(AI) 관련 기업 등 신규 원전 수요가 러시아에 잠재적인 시장을 제공하고 있어서다.
원조를 미끼로 한 ‘입김’도 키우고 있다. 세계은행에 따르면 지난해 말 기준 러시아의 대외 융자잔액은 301억 달러(약 43조 8000억 원)로 전년 대비 4% 증가했다. 이는 1999년 이후 최고 수준이다. 지난달 확정된 러시아의 내년 연방 예산에서는 해외 융자가 5000억 루블(약 7조 1000억 원)을 웃돌았다. 우크라이나 침공 전인 2021년 대비 60%나 늘어난 규모다. 니혼게이자이신문은 “신흥·개도국 중심의 일명 ‘글로벌 사우스’를 반(反)서방 진영으로 끌어들이려는 의도”라고 짚었다. 융자잔액이 많은 국가로는 지난해 말 기준 벨라루스가 77억 달러였으며 방글라데시(66억 달러), 인도(41억 달러) 등의 순이었다. 빌려준 돈은 원전·인프라 등 개발 원조에 충당되며 일부는 러시아산 에너지나 무기 수입 자금으로도 사용되는 것으로 추정된다.
일각에서는 러시아 경제를 희생한 대가라는 지적도 나온다. 앞서 러시아는 거액의 부채를 안은 아프리카 국가들에서 상환 지연이 발생해 약 7억 달러 규모의 채권을 포기했다. 올해 예산에서도 원리금으로 약 990억 루블의 상환을 예상했으나 실제 거둬들인 돈은 절반에도 못 미쳤다. 전쟁 장기화로 재정이 악화한 상황에서 군사 예산을 확보하기 위해 연금 급여액을 줄이거나 인프라 개선을 미루면서 러시아 내부의 불만 역시 고조되고 있다.
이런 가운데 푸틴 대통령의 활동 반경은 갈수록 넓어지고 있다. 올해 3월 대통령 선거에서 5선을 결정지은 푸틴 대통령은 5월 중국에 이어 6월에는 24년 만에 북한을 찾아 김정은 국무위원장과 만났다. 9월에는 국제형사재판소(ICC) 가맹국인 몽골도 방문하며 광폭 행보를 보였다. ICC가 2023년 푸틴에 대해 체포영장을 발부한 후 그가 ICC 가맹국을 방문한 것은 처음이었다. 크렘린궁은 푸틴 대통령이 올해에만 총 11회 해외를 방문하고 220회 이상의 국제 활동을 진행했다고 밝혔다. 내년에는 백악관에 재입성하는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당선인과의 정상회담도 성사될 것으로 전망된다. 이달 19일 푸틴 대통령이 연례 기자회견에서 트럼프와 언제든 만날 준비가 돼 있다고 말했고 트럼프 역시 임기 초기에 푸틴 대통령과 만날 수 있음을 시사했다. 닛케이는 푸틴의 이 같은 행보에 대해 “우크라이나 전쟁이 길어지는 가운데 고립을 피하고 향후 정전 협상 등을 유리하게 끌어가려는 의도로 보인다”고 해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