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산책] 한글 서명의 상징적 의미

2024-10-04

그림 한구석에 적혀있는 화가의 서명은 문장으로 치면 마침표 같은 것이다. 완성된 작품이라는 선언이기도 하다. 위작 소동이 벌어지면 가짜냐 진짜냐를 가리는 중요한 근거가 되기도 한다.

서양화를 그리는 화가들은 대개 영어로 멋지게 일필휘지하고 회심의 미소를 짓는 것이 보통이다. 하지만, 박수근이나 이중섭 같은 작가는 한글로 서명한다. 정겨운 느낌이 전해진다. 박수근 그림에 등장하는 둘러앉아서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는 노인들이나 아이들의 모습 한구석에 쓰여 있는 ‘수근’이라는 한글 서명을 보면 그림 안의 인물들이 정겹게 수군수군 대는 것 같다.

좀 지나친 생각인지도 모르겠는데, 한글 서명을 보면 한국인이라는 자부심이 느껴지기도 한다. 민족적 긍지를 소중하게 여기는 일부 작가들이 한글 서명을 고집하는 것도 그런 까닭일 것이다.

영어로 서명하는 것이 당연한 일인 것으로 여겨질 수도 있겠지만, 조금 깊게 생각해보면 한글 서명은 매우 상징적인 의미를 갖는다. 즉, 그림의 기법은 서양의 것을 받아들였다 하더라도 내용과 정신은 우리 것을 지키는 것이 바람직하지 않을까, 한글 서명은 그런 바람을 상징적으로 말해준다.

우리가 잘 아는 대로, 한국 사회가 서양의 문화를 받아들일 때 주체성을 주장할 상황이 아니었다. 일제강점기, 해방 직후의 극심한 좌우대립, 6·25 한국전쟁, 미국 문화의 홍수….격동의 역사를 거치면서, 한국의 현대화는 곧 서구화였고, 서구 문화를 비판적으로 골라서 받아들일 수 없는 형편이 아니었다. 정확하게 표현하자면, 정신 차려보니 서구 문화가 이미 들어와 안방을 차지하고 있었다는 것이 정확할 것 같다.

가령, 어린 시절 아무런 생각 없이 뜻도 모르고 미국에서 들어온 노래 팝송을 부르며 놀았고, 할리우드 영화를 보며 미국의 화려한 생활을 부러워했다. “헬로 헬로쪼코레또기브미, 헬로 헬로 먹던 것도 좋아요.” 같은 비굴한 노래에 그런 상황들이 잘 나타나 있다. 그런 상황은 문화 예술 분야에서도 마찬가지였다. 80년대 민족정신 회복, 우리 것 찾기 운동 등이 중요하게 대두하기 전까지 서양 흉내 내기가 주류를 이룬 것이 사실이었다.

그런 상황이었기 때문에 한국인의 정체성을 소중하게 여기는 한글 서명이 한결 더 반가운 것이다. 이야기가 나온 김에 이름에 대해서도 한마디 하고 싶다. 세계무대에서 이름을 드러낸 예술가들은 한국 이름을 고집한다. 백남준, 윤이상, 이응로, 오순택, 정명훈, 정경화, 서도호, 강익중, 손열음 등등이 그런 사람들이다. 조금이라도 빨리 유명해지기 위해서는 부르기 쉬운 영어 이름을 만드는 것이 유리하다는 계산보다는 이름이 갖는 자기 정체성을 소중하게 여기는 것이다.

미국에 살면서 여러 가지 현실적 편리성을 앞세워 영어 이름을 만들고 보는 한인들과는 크게 다르다. 부르기 좋고, 기억하기 쉽다는 편리성이 얼마나 큰지는 잘 모르겠지만, 이름은 한 사람의 정체성을 대표하는 고유명사다. 특히, 결혼해서 미국식으로 남편 성을 딴 여자가 미국 이름을 만든다면, 이름의 정체성이 사라져버린다. 우리 주위에 그런 예는 얼마든지 있다.

미국에 사는 사람들이 영어 이름을 갖는 것이야 현실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일이지만, 한국의 인기가수가 영어 이름을 가지고 영어 가사로 노래를 부르고, 상품명이나 가게 이름이 영어 범벅인 일들은 좀 당황스럽다.

이 같은 자존감, 자기애가 별것 아닌 것으로 보일지 모르지만, 사실 이런 기본자세가 작품이나 예술 활동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친다. 그래서 눈여겨보는 것이다.

장소현 / 시인·극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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