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태우 비사
제7부. 문민정부에서 심판 받는 신군부
1회. 신군부 청산 신호탄 ‘노태우 비자금’ 사건

동화은행 사건에 꼬리 잡힌 노태우 ‘검은 돈’
새 정권이 출범하면 언제나 ‘성역 없는 사정’을 부르짖기 마련이다. 1993년 2월 25일 출범한 김영삼 정권의 경우 더 그랬다. 전두환·노태우의 신군부 정권, 나아가 박정희 이후 32년의 군부 정권 시대를 마감한 ‘문민 정부’라는 자긍심이 대단했다. 검찰에 엄명이 떨어졌다. 검찰은 수집된 범죄 정보를 샅샅이 뒤졌다.
대검 연구관 함승희 검사가 ‘동화은행장, 직원들에 시중 백화점 영수증 모으게 한다고 구설수’라는 정보에 주목했다. ‘영수증을 모은다’는 것은 ‘비자금을 만든다’는 얘기다. 은행장이 비자금을 만든다면 로비용 뇌물일 가능성이 높다. 동화은행장은 6공 핵심과 가까운 것으로 알려진 금융계 거물이었다.
함승희는 4월 21일 안영모 은행장을 연행했다. 안영모 입에서 ‘6공 인사’ 명단이 줄줄이 나왔다. 주목할 인물은 3명. 노태우 대통령의 경제수석이었던 김종인 민자당 의원, 노태우의 절친 이원조 민자당 의원, 그리고 노태우의 최측근 이현우 전 경호실장이었다.
그런데 ‘성역 없는 사정’은 정치구호에 불과했다. 함승희 검사는 3명 가운데 김종인만 수사할 수 있었다. 당시 청와대와 검찰 수뇌부가 수사 확대를 막았다. 결국 김종인은 뇌물 혐의로 기소돼 징역 2년6개월에 집행유예 4년을 선고받았다.
그러나 이원조는 일본으로 도망쳐 수사를 받지 않았다. 이원조는 1992년 노태우 대통령의 부탁을 받고 김영삼 민자당 대통령 후보의 대선자금을 만들어준 인물이다. 노태우 회고록에 따르면 ‘1000억원’을 만들어 주었다고 한다. 신군부의 돈으로 정권을 창출한 김영삼 정권의 한계다.
문제는 이현우다. 안영모의 비자금 2억원이 이현우 계좌로 들어간 것을 확인했다. 안영모를 추궁하자 “뇌물이 아니라 거액(1000억원)을 예치해준 데 대한 사례금”이라고 설명했다. 확인해 보니 수백 개 가명계좌에 1000억원이 숨겨져 있었다. 노태우 비자금이었다.
함승희는 이현우 소환 수사를 건의했지만 검찰 수뇌부는 난색을 표했다. 낌새를 눈치 챈 노태우 측에서 거세게 항의했다. 노태우 비자금은 김영삼 정권의 치부이기도 했다. 수사가 멈칫했다.
얼마 뒤 함승희 검사는 충남 서산지청장으로 자리를 옮겼다. 1994년 들어 대검 중수부에서 노태우 비자금에 대한 내사를 다시 시작했다. 돈을 준 재벌 총수들까지 비밀리에 불러 확인했다. 함승희가 파악했던 1000억원보다 규모가 더 컸다. 함승희는 빼고 수사가 조용히 마무리됐다. 그렇게 덮고 지나가는 듯했다.
YS 측근 서석재가 흘린 ‘노태우 4000억 비자금’
다시 1년여 세월이 흘렀다. 1995년 8월 1일 토요일 밤 서석재 총무처 장관이 민자당 출입기자들을 서울 인사동 한정식집으로 초대했다. 통상 총무처 장관은 여당(민자당) 출입기자들의 취재 대상이 아니지만, 서석재의 경우 김영삼 대통령의 최측근이기에 기자들이 몰려갔다. 폭탄주가 돌고 분위기가 풀어졌을 무렵 서석재가 한마디 던졌다.
“이거 오프(Off the Record. ‘보도 안 한다’는 전제)요. 기업 하는 친구가 찾아왔어요. 4000억원 가명계좌를 가진 사람이 있는데, 절반을 국가에 헌납하면 나머지는 출처 조사 안 받고 실명 전환하게 해 줄 수 있냐고 물어왔어요. 알아보니 ‘출처 조사 못 피한다’해서 그렇게 전해줬어요.”
당시 전직 대통령의 비자금이 전격적인 금융실명제 실시(1993년 8월)로 ‘실명 전환’ 하지 못해 시중에 떠돌고 있다는 소문이 무성했다. 당연히 기자들이 “전직 대통령 얘기냐”고 물었다. 서석재는 “둘(전두환·노태우) 중 하나. 알지만 말 못 한다”고 말했다. 서석재는 “가명계좌 얘기는 진짜 오프”라고 재강조했다.

‘노태우 비자금 4000억’설은 금융실명제가 전격 실시되던 무렵부터 권력 핵심부에 나돌았다. 노태우가 동서 금진호 의원을 통해 은밀하게 김영삼 청와대에 문의해 왔다는 소문이었다. ‘비자금 4000억원을 실명 전환하도록 도와달라’는 SOS였다. 서석재가 말한 ‘기업인 친구’와 비슷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