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하연 봉우리김치 대표 문헌에만 존재 ‘해물섞박지’ 복원 식품명인 반열 올라/전복·굴·낙지·소라 등 해산물 듬뿍 들어가/어렵게 길거리 음식으로 시작해 강남 유명 한정식 열어/2003년부터 다양한 김치 연구 2014년 대한민국식품명인 획득/3·4대 대한민국김치협회장 6년 역임/ 매년 초중고생 1000여명 대상 ‘찾아가는 김치교실’ 열어/김치세계화·김치테마파크 건립 꿈꿔
김치찌개, 김치전, 김치볶음밥, 김치김밥, 김치찜에서 김치피자, 김치샌드위치까지. 한국인의 식탁에서 김치를 빼놓고 얘기할 수 있을까. 아무리 현지식을 잘 즐긴다 하더라도 해외여행이 일주일을 넘어가면 얼큰한 김치찌개가 미치도록 그리운 건 우리 몸속에 ‘김치 DNA’가 선명하게 각인돼 있기 때문이다. 종류는 또 얼마나 많은가. 간이 심심하고 아삭아삭한 강원도식 김치에서 속젓을 아낌없이 넣어 깊은 풍미가 배어 나오는 진한 전라도식 김치까지 지역마다 스타일이 천차만별이고 종류도 끝이 없다. 그중 하나가 임금에게 진상하던 해물섞박지. 전복, 굴, 낙지, 소라 등 몸에 좋다는 해산물이 잔뜩 들어간다니 얘기만 들어도 군침이 당긴다. 문헌에만 존재하던 해물섞박지를 실물로 복원해 식품 명인 반열에 오른 이하연(66) 봉우리김치 대표를 따라 맛있는 김치 세상을 들여다본다.
◆어머니의 김치와 해물섞박지
한정식집을 운영하던 이 대표가 김치 명인에 도전한 것은 2010년쯤이다. 1809년 빙허각 이씨가 만든 ‘여성생활백과’ 규합총서를 들여다보다 그만 ‘셧박지’에 꽂히고 말았다. 어렸을 때 어머니가 만들어주던 해산물김치와 비슷했기 때문이다. “규합총서에는 다섯 가지 김치가 등장하는데 그중 셧박지는 스태미나 음식으로 잘 알려진 낙지와 굴에 전복과 소라까지 들어가는 아주 화려한 김치로 소개돼 있어요. 그때 무릎을 탁 쳤어요. 이 김치를 복원해서 많이 알려야겠다는 욕심이 들더군요. 물론 식재료만 소개돼 있고 레시피는 없었죠. 그날로 연구에 매달려 매일 별의별 방법으로 만들어 식당 손님들에게 맛을 보게 했어요. 그렇게 5년 동안 매달린 끝에 마음에 드는 레시피가 완성됐고 2014년 명인 심사를 신청했답니다. 심사위원이 맛을 보더니 문헌에서만 보던 셧박지를 이토록 매력적인 김치로 복원했다는 사실에 감탄했고 한 번에 심사를 통과했답니다.”
해물섞박지는 겨울에만 만든다. 주된 채소로 가지, 오이와 함께 겨울에만 생산되는 동과가 들어가기 때문이다. 무의 두 배 크기인 동과는 박과에 속하는 채소로 1670년에 만든 최초의 한글 조리서 음식디미방에도 나올 정도로 조선시대에 많이 쓴 식재료다. 박과 비슷한 맛을 내는데 당뇨 치료에 좋고 신장 기능도 높이는 효능이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2003년부터 엄청나게 많은 종류의 김치를 만들어 봤는데 확실히 조선시대 양반가 김치가 맛이 있더군요. 지금은 산업화로 가격경쟁을 하다 보니 안타깝게도 김치의 수준이 하향평준화됐답니다. 소비자는 보다 저렴한 김치를 찾고 생산자는 원가절감을 최우선으로 삼다 보니 재료가 덜 들어가고 부족한 맛을 채우기 위해 설탕 등 화학 첨가물만 많이 들어갑니다. 제가 만드는 김치는 첨가물이 전혀 없고 오로지 식재료만으로 맛을 낸답니다. 어린 시절 어머니는 김치를 담글 때 첨가물을 전혀 안 썼는데 이를 보고 배운 거죠. 해물섞박지는 정말 일반 김치와는 맛이 달라요. 국물에 소면을 말아 먹으면 희한한 감칠맛을 느낄 수 있답니다.”
수많은 연구 끝에 탄생했지만 해물섞박지는 이미 어린 시절 그의 미각 속에 녹아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명인의 고향은 배가 드나들던 금강하구인 전북 익산의 웅포로 어머니가 늘 싱싱한 해산물을 넣어 만든 김치를 먹으며 자랐단다. “어머니는 김장철이 오면 갈치, 조기, 명태, 낙지, 오징어, 새우, 황석어, 꼴뚜기 등 다양한 해산물과 토굴에서 숙성한 젓갈을 듬뿍 넣은 김치를 담갔고 덕분에 겨울에 정말 맛있게 먹었답니다. 아버지가 창극의 고수였는데 요즘 말로 프로덕션을 운영하며 다양한 국악 공연을 기획했어요. 그래서 늘 종가처럼 손님이 넘쳐났고 어머니는 다양한 요리를 만들어 손님에게 대접했답니다. 어린 시절 웅포는 황포돛배가 다니고 낙조도 아름다운 곳이었죠. 요즘 같은 학원은 아예 없었고 친구들과 강가에서 조개를 잡거나 나물 캐고 노는 게 일상이었답니다. 비가 오면 논에서 붕어, 송사리를 잡아서 시래기를 넣고 지져 먹던 기억도 납니다. 어머니를 도와 장아찌, 젓갈, 김치도 담갔죠. 그때 이미 계절마다 어떤 식재료가 나오는지 터득한 것 같아요. 여기에 어깨너머로 배운 어머니의 손맛이 더해지면서 김치 명인 자리까지 오게 된 것 같네요.”
명인은 50가지 김치로 전시회를 할 정도로 국내 김치 명인 중 가장 많은 김치를 만들어 선보였는데 해물섞박지 명인답게 해산물 김치를 잘 만들기로 유명하다. 예전에는 식당 단골손님들에게 가끔 내놓았다. 하지만 요즘은 재료값이 너무 비싸 판매용으로 만들지는 못하고 교육용으로만 소량 선보인다.
◆실패한 김치공장 운영에서 얻은 교훈
명인은 고등학교를 졸업한 뒤에는 그저 평범한 직장인이었다. 식품회사에서 영업일을 하던 명인은 남편 유학을 뒷바라지하느라 전셋집까지 처분하는 바람에 두 아이를 키우며 생계를 직접 꾸려야 했다. 그렇게 시작한 일이 길거리 음식 장사였다. 직접 담근 김치와 질 좋은 돼지 목살을 다져서 만들었는데 ‘길거리 고급 만두’로 소문나면서 순식간에 인기를 끌었다. “그때 잘하면 음식 장사로 돈을 벌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이것저것 하다가 서울 덕성여대 앞에서 호프집 ‘한국인’을 차렸는데 단골이던 교수가 손맛이 좋으니 한정식집을 한번 차려보라고 조언을 했어요. 반신반의하며 광화문의 유명한 한정식집에서 음식을 먹어보니 충분히 할 수 있겠더라고요. 어릴 때부터 어머니에게서 배운 것도 있었기에 자신감을 갖고 1997년 서울 강남구 역삼동에 한정식집 ‘봉우리’를 오픈했는데 해산물김치가 맛있다는 소문이 나면서 손님들이 엄청 몰려 왔답니다. 전직 대통령과 국무총리도 방문했을 정도예요. 한 해 매출 30억원을 넘길 정도로 잘나갔죠.”
그렇게 명인은 한정식으로 강남을 평정했지만 큰 시련을 겪는다. 김치공장을 차렸다가 4~5년 만에 약 20억원을 날리고 말았다. “2003년 강릉에 하루에 900㎜가량의 폭우가 쏟아져 수많은 이재민이 발생했고 고랭지 배추가 다 쓸려가 버렸어요. 이후 중국산 김치가 무더기로 수입된다는 뉴스를 보고 깜짝 놀랐답니다. 한국은 김치 종주국인데 김치를 수입한다는 게 말이 되나요. 이에 직접 충북 단양에 김치공장을 차렸는데 시쳇말로 말아먹었죠. 제조와 유통과정을 전혀 모른 채 무턱대고 뛰어든 게 화근이었답니다. 값싼 수입 김치와 경쟁하려면 소비자가를 대폭 낮춰야 하는데 제 김치는 고급 식재료를 쓰기 때문에 도저히 소비자 단가를 맞출 수가 없었어요. 서울에서 오가며 공장을 관리하는 것도 쉽지 않았죠. 결국 이건 도저히 내가 할 수 있는 사업이 아니라는 걸 깨닫고 공장을 헐값에 처분했답니다.”
하지만 명인은 김치를 포기할 수는 없었다. 자신의 한정식집에서 누가 뭘 넣었는지도 모르는 김치를 손님 식탁에 내놓기 싫었기 때문이다. 김치만이라도 마음 놓고 먹을 수 있는 식당 한 곳이라도 있어야 한다는 신념으로 경기 남양주에 김치문화원을 작게 차려 소규모로 김치를 계속 만들었고 다양한 김치를 연구하기 시작했다. 그 결과 전복김치, 홍어김치, 빙어김치 등 이하연의 ‘명품김치’가 하나둘씩 만들어졌고 이 경험을 토대로 해물섞박지도 탄생했다.
이 김치는 세계에서 입소문을 타고 있다. 지난 8월 뉴욕타임스가 이 대표 등 김치 명인 5명의 김치를 소개했다. 지난해 11월에는 영국 찰스 국왕에게도 명인의 김치가 선물로 전달됐다. 런던에 거주하는 제자가 한인타운에 방문하는 찰스 국왕에게 전달할 김치를 요청했고 명인은 외국인의 입맛에 맞게 레시피를 조절했다. “고춧가루는 절반만 쓰고 새우젓과 육젓 등 젓갈도 조금만 넣었어요. 소금간으로 맵지 않고 자극적이지 않게 만들어 보냈답니다. 지난해 봄에는 주한벨기에대사관이 100여명을 초대한 행사에서 김치와 김치찌개를 선보였고 지난해 영국관광공사 행사에도 참여했답니다.”
◆법정기념일 ‘김치의 날’을 만들다
‘김치의 날’ 제정도 그의 작품이다. 명인은 2018년부터 6년 동안 3·4대 대한민국김치협회 회장을 맡아 활동했는데 그의 공약이 김치의 날 제정이었다. “우리나라는 김치의 종주국인데 김치의 날이 없더군요. 이에 2018년부터 농림축산식품부와 국회를 끊임없이 설득해 2년 만에 김치의 날을 법정기념일로 이끌어 내는 데 성공했답니다. 김치 하나하나 재료에 22가지 효능이 있다는 뜻에서 11월22일로 정했어요. 실제 2006년 미국 헬스지가 세계 5대 건강식품으로 스페인 올리브, 그리스 요구르트, 일본 낫토, 인도 렌틸콩과 함께 한국의 김치를 선정했어요. 또 같이 모여서 김장하고 김치를 나누는 우리 김장문화가 2013년 유네스코 무형문화유산으로도 등재됐답니다. 김치는 장 건강에 아주 좋아요. 김치의 유산균이 유해균을 없애고 유익균을 만들어 내죠.” 명인은 올해도 김치의 날 행사에서 다양한 김치를 직접 만들어 소개했다.
많은 셰프들도 명인을 찾아 김치를 배우며 충북 괴산 김장축제, 광주세계김치연구소의 김치리더스아카데미, 대학 조리학과, 대기업 등에서 김치 교육도 진행한다. 특히 매년 초중고 학생 1000여명을 상대로 ‘찾아가는 김치교실’을 열어 미래세대에게 제대로 된 김치를 전파하는 데도 발 벗고 나서고 있다. “요즘 아이들은 김치를 잘 안 먹어요. 맛있는 김치를 못 먹어 봤기 때문이에요. 패스트푸드 등 가공식품에 입맛이 젖어 어떤 게 맛있는 것인지 제대로 구분을 못 한답니다. 이런 아이들에게 김치 맛을 제대로 알리는 것이 저의 중요한 역할이라 생각해요.”
요즘 명인은 인기 유튜버로도 맹활약 중이다. 다양한 김치 레시피를 소개하는 동영상을 390여편 제작했는데 주부들이 앞다퉈 영상을 찾아보면서 구독자 수가 13만명을 넘을 정도로 큰 인기를 끌고 있다. 이제 명인은 김치테마파크 건립이라는 큰 꿈을 꾸고 있다. “요즘은 집에서 김치를 거의 안 담그잖아요. 하지만 김치는 한국인의 솔푸드인 만큼 가족들이 와서 오순도순 김치를 담그고 김치요리도 즐기는 그런 김치테마파크를 만들고 싶어요.”
김치의 세계화도 이루고 싶단다. “피자가 세계화되니 결국 이탈리아 나폴리 피자를 찾게 되잖아요. 김치도 마찬가지예요. 같은 재료라도 나라마다 맛이 다 다르기 때문에 김치도 세계화되면 결국 오리지널인 한국 김치를 찾게 될 겁니다. 김치는 굉장히 독창성이 있는 음식인 만큼 세계인의 식탁에 오를 충분한 가치가 있어요. 김치로 부자가 되는 분들이 많이 나오면 좋겠네요. 저도 김치 종주국의 위상을 잘 지킬 수 있도록 앞으로도 다양한 김치를 선보일 계획이니 많이 기대해주세요.”
이하연 식품명인은…
●1958년 전북 익산 출생 ●전남과학대학교 호텔조리김치발효학과-청운대학교 호텔외식경영학과 졸업 ●대한민국식품명인 제58호 지정(2014년·해물섞박지) ●대한민국김치협회 부회장(2011~2017년) ●대한민국김치협회 3·4대 회장(2018~2023년) ●대한민국명인협회 이사(2017~2023년) ●농업인의 날 대통령 표창(2012년) ●김치엑스포 대상(2007년) ●주요 저서(장안에 소문난 김치명인 이하연의 명품김치·내가 담근 우리집 첫 김치·이하연의 발효음식·이하연의 한국전통김치 DVD 제작) ●대학·기업 강의(경희대·혜전대·수원여대·동원대·우송대·전남대·수원과학대·삼성전자·LG패션 등)
남양주=글·사진 최현태 선임기자 htchoi@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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