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925년 우리나라 치과의사들은 일제의 압정에 굴하지 않고 우리 국민의 구강보건은 우리의 손으로 지켜야 한다는 의지를 모았다. 그로부터 100년. 대한치과의사협회는 격변하는 시대의 풍랑 속에서도 흔들림 없이 국민의 곁을 지키며, 오늘날 세계를 선도하는 ‘K-덴티스트리’의 시대를 활짝 열었다. 이에 본지가 창간 58주년을 기념해, 대한치과의사협회사를 토대로 국민과 함께한 대한치과의사협회 100년 역사의 순간들을 되돌아봤다. <편집자 주>
‘1호 치과의사’ 함석태 선생과 한성치과의사회
치아와 치과 치료에 관한 우리 기록은 ‘유리이사금(儒理尼師今)’을 대표로 한 삼국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가지만, 전문의료인으로서의 ‘치과의사’ 자격은 1914년 ‘함석태(咸錫泰)’ 선생이 최초 등록했다. 그러나 일제강점 당시 실정상 한국인 치과의사의 사회적 지위는 상당히 제한적이었다. 이를 짐작할 수 있듯 조선 최초의 치과의사단체인 ‘조선치과의사회’는 지난 1921년 창립 당시 임원 전원이 일본인 치과의사로 구성됐으며, 회원 중에서도 한국인 치과의사는 함석태, 김창규, 한동찬 단 3명뿐이었다고 기록은 전하고 있다. 이들 또한 창립총회에 참석했다는 증빙은 남아있지 않다.
하지만 이러한 일제의 압정 속에서도 대한민국 구강보건의 꽃은 피었다. 오직 한국인만의 치과의사회가 1925년 조직된 것이다. 오늘날 치협이 뿌리를 두고 있는 ‘한성치과의사회(漢城齒科醫師會)’의 창립이다.
한성치과의사회는 일본 관헌의 감시 압력에도 불구하고 이 땅에 치의학의 홀씨를 뿌렸다. 특히 초대 회장을 역임한 함석태 선생은 한국인 치과의사로서 사회에 봉사가 되는 일이라면 어떠한 노력도 불사해야 한다는 나라와 동포 사랑의 철학을 치과계 초석에 깊이 새기고자 노력했다. 그러한 정신을 오롯이 이어받았기에 치협은 국민과 함께 지난 100년 역사를 써 내려갈 수 있었다.
해방과 6·25 전쟁, 국민과 아픔 나눈 치협
일제강점기를 지나 1940~50년대, 해방과 6·25전쟁이라는 희비가 갈마드는 격동의 시기에도 치협은 국민의 고통을 분담하고자 했다. 치협은 미군정이 선포된 이듬해인 1946년에는 6월 9~15일을 ‘구강위생 강조주간’으로 설정하고 전국 모든 치과의사가 무료 구강검사와 구강위생교육 활동을 펼쳤다. 또한 1946년부터는 무료 진료봉사대를 전국 파견해, 산간벽지까지 치과 의료 혜택을 나눴다.
1950년 전란의 순간에도 치협은 국민을 위한 인술을 펼쳤다. 당시 치협이 세계보건기구(WHO)에 전달한 바에 따르면, 서울 개원의 214명 중 약 80%가 전란에 휩쓸려 삶의 터전을 잃었다. 또 전국 대부분의 치과가 궤멸 상태에 놓여 있었다고 보고된다. 그럼에도 치협은 1952년 서울대학교 치과대학에 임시진료소를 열고, 국민의 상처를 돌봤다.
무치의촌 순회 진료·새마을운동 참여
1953년 7월 27일 정전 협정이 체결됐지만 국민은 여전히 전란의 폐허 속에 시름하고 있었다. 이에 치협은 지난 1956년 무치의촌 순회진료반을 편성해, 방방곡곡 무료 진료 봉사를 펼쳤다. 또 같은 해 서울시치과의사회와 공동으로 주관한 제11회 구강위생강조주간에서 첫날인 6월 9일을 ‘구강위생의 날’로 정하고 구강보건의 중요성을 국민에게 전달하고자 했다.
국민을 위한 이러한 노력은 1960년대에 들어서는 더욱 활발히 전개됐다. 1966년 12월 15일에는 본지의 전신인 ‘칫과월보(齒科月報)’를 창간해 국민과 소통의 창구를 열었다. 특히 1968년 6월 8일 제23회 구강보건주간 기념식에서는 박정희 전 대통령이 치과용 이동진료차 10대를 하사하며, 구강보건의 중요성을 고취했다.
1970년대 전개된 범국민 지역사회 개발 운동인 ‘새마을운동’에서도 치협은 앞장서기를 망설이지 않았다. 1974년 치협은 전국 38개 반을 통해 ‘새마을 진료 활동’을 펼쳤다. 또 1976년 10월에는 회관 내 ‘새마을 치과진료원’을 개원했다. 그 뒤 1979년 휴원까지 새마을 치과진료원은 소외계층 3800명에게 무료 진료를 베풀었다. 기록에 따르면, 이때 참여한 치과의사 연인원만 1387명에 달했다. 당시 전국 치과의사 총원이 약 2600명에 불과했다는 사실을 놓고 보면, 국민과 사회에 이바지하려는 치과의사들의 지대한 희생정신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또 이 무렵 국내 당뇨병 위기론이 대두하자, 치협은 1977년 ‘설탕 덜 먹기’ 운동을 전개하고 ‘설탕은 아편이다’라는 슬로건과 함께 서울 명동 일대에서 가두 운동을 벌이는 등 국민 인식 개선에도 앞장섰다.
‘한강의 기적’과 ‘IMF’ 선진 의료 향한 여정
1980~90년대 우리나라는 ‘한강의 기적’과 ‘IMF 위기’를 동시에 겪었다. 당시 치협은 전국적 치과의료전달체계를 구축하고 1989년 제14차 아시아태평양치과의사연맹회의, 1997년 제85차 세계치과의사연맹(FDI) 서울 총회를 개최하는 등 선진 치과의료를 향한 본격 도약에 나섰다.
그만큼 사회 참여도 활발하게 전개했다. 치협은 1983년 ‘KAL기 격추 규탄대회’, ‘아웅산 참사 규탄대회’, ‘새마을 및 정화위원회’에 참가했다. 또 1988년 88올림
픽 무렵 에이즈(AIDS) 감염 예방이 사회 문제로 대두하자, 대국민 예방 교육을 펼쳤다. 또 ‘수돗물 불소 농도 조절 사업’을 확대하고 ‘치면열구전색사업’을 실시하는 등 국가적 사업을 주도했다.
이러한 가운데 1997년 외환 위기(IMF) 사태가 불거지며, 수많은 국민이 노숙인으로 전락하는 불행에 처했다. 이에 치협은 노숙인 무료 진료센터를 개설해, 국민에게 위로의 손길을 건넸다. 또 경제력을 잃은 노인들에게 사랑의 틀니를 전달하고, 실업성금을 기탁하는 등 아낌없는 구호 활동을 펼쳤다.
‘K-덴티스트리 시대’ 치과 강대국 자리매김
이러한 역동의 시기를 견딘 치협은 2000년대에 접어들어서는 본격적으로 국제 사회 선도에 나섰다. 특히 지난 2003년 윤흥렬 전 협회장이 세계치과의사연맹(FDI) 회장에 당선되며, 치협은 명실상부 전 세계 구강보건 리더의 자리에 올랐다.
또한 이 시기 치협은 우리나라 치과의료산업을 부흥하기 위한 터전을 일구는 데도 앞장섰다. 그 결과 오늘날 치과의료산업은 국민 먹거리의 한 축을 당당히 견인하는 국가 주요 산업으로 성장했다. 지난 2021년 기준 우리나라 치과 제품 수출 규모는 12억4400만 달러(한화 약 1조7000억 원)로 전 세계 주요 35개국 중 5위를 기록했다. 특히 임플란트는 지난 2023년 수출 1조 원을 돌파하는 금자탑을 쌓았다.
이러한 치과계의 성과는 곧 구강건강 증진 혜택으로 국민에게 되돌아가고 있다. 오늘날 우리나라 국민이라면 누구든 국가건강검진을 통해 구강검진을 받을 수 있다. 영유아의 경우 생애주기에 맞춰 4회 검진이 제공되고 있다. 또 19세 이상 성인은 연 1회 건강보험 스케일링을 낮은 부담으로 받을 수 있다. 이 밖에도 치과계는 셀 수 없이 많은 사업을 전개하며 국민에게 건강한 미소를 선사하고 있다.
그리고 오는 2025년 100주년을 맞이하는 치협은 전 세계가 주목하는 ‘K-덴티스트리’의 시대를 활짝 열어젖힌다. 특히 내년 4월 11~13일 인천 송도 컨벤시아에서 개최하는 100주년 기념식에서는 ‘국민과 함께한 100년, 밝은 미소 100세까지’라는 슬로건에 걸맞게 전 국민이 참여할 수 있는 축제의 장을 만들 예정이다.
이제 국민과 함께 새로운 100년을 향해 달려 나갈 대한치과의사협회. 모든 국민이 건강하고 아름다운 미소를 지을 수 있는, 치협이 그려나갈 밝은 미래를 치의신보가 응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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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곡의 현대사, 대한치과의사협회 100주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