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조간신문들을 읽다가 한 신문의 귀퉁이 기사에 눈길이 갔다. ‘대불산단 전봇대 뽑기 속도 낸다’는 짧은 기사였다. ‘아니, 이명박(MB) 정부 규제 개혁의 상징이었던 대불공단 전봇대를 아직도 뽑고 있는 건가?’라는 생각은 나만의 것이 아닐 게다. 알아 보니, 대불공단 전봇대는 지금도 남아 있었다. 전말은 이랬다.
2008년 1월 대통령 당선인 MB는 인수위에서 “대불공단에 가봤는데 전봇대 하나 옮기는 것도 몇 달이 지나도 안 된다고 하더라”고 했다. 당선인 발언이니 무게가 실렸다. 언론은 대서특필했고 사흘 만에 전봇대 두 개가 뽑혔다. 비가 와서 감전사고 위험이 있는데도 공사는 강행됐다. 당시 이경숙 대통령직 인수위원장은 “마음의 전봇대도 뽑아야 한다”고 했다. 관행 탓에 익숙한 생활 규제 같은 ‘마음속 규제’까지 없애자는 좋은 취지의 발언이겠다. 전봇대 신화는 이렇게 완성됐다.
대불공단 전봇대는 지금도 남아
규제보다는 지자체 예산 부족 탓
미국 기준으로 규제 개혁했으면
사정은 그리 간단치 않았다. 대불공단은 자동차 부품과 조립금속 업체의 중국·동남아 수출기지로 1997년 조성됐다. 지금처럼 대형 화물이 오가는 공단을 염두에 둔 게 아니어서 지중화 선로 대신 저렴한 지상 전봇대가 세워졌다. 공단 절반이 미분양되자 2000년 이후 선박용 대형 블록 제조업체가 입주하기 시작하면서 문제가 생겼다. 국내 건조 선박의 대형화로 높이 32m 이상의 대형 블록 생산이 늘었는데 8~12m의 낮은 전봇대 때문에 불편이 컸다. 전남도는 “선박용 블록을 운송하는 과정에서 전봇대를 만나면 전선을 절단하거나 먼 거리를 우회해야 했다”고 했다.
전봇대 몇 개를 뽑는다고 해결될 문제가 아니었다. 달라진 공단 성격에 맞춰 노후 공단을 업그레이드해야 했다. 노후 공단은 전국에 산재해 있으니 대불공단에만 재정을 쓸 수도 없었다. 얼토당토않은 낡은 규제 탓이라기보다 예산 배분의 문제였다. MB 전봇대 발언 며칠 뒤 당시 김영주 산업자원부 장관이 “제도적인 문제”라고 조심스럽게 밝힌 것도 이런 이유겠다. 정부가 공단을 만들면 관리는 지자체가 하게 돼 있는데, 영암군 재정 문제로 진전이 없던 거였다.
대불공단 전봇대는 대부분 MB 정부 5년을 무사히(?) 넘겼고, 전선 지중화 사업은 지자체 재원 부담 때문에 더디게 진행되다 2016년 이후 사업이 사실상 중단됐다. 그러다가 2023년 산업통상자원부의 그린뉴딜 전선 지중화사업 공모에 선정되면서 전봇대 뽑기가 재개됐다. 내년도 공모에도 선정됐다. 그렇다고 전봇대가 다 뽑히는 건 아니다. 전남도는 “정부의 뉴딜 전선 지중화 공모는 내년이 마지막”이라며 “열악한 지방 재정만으로는 추가 전선 지중화에 한계가 있다”고 했다.
MB의 전봇대는 박근혜 정부의 ‘손톱 밑 가시’ ‘신발 안 돌멩이’나 문재인 정부의 ‘붉은 깃발’(자동차 속도를 마차 속도에 맞췄던 영국의 규제)처럼 낡은 규제의 상징이었다. 하지만 정작 MB는 회고록에서 “새 정부의 부처 조정에 따른 업무 효율 향상을 강조하는 과정에서 한 말”이라며 “내 뜻과는 다르게 ‘전봇대 뽑기’가 정부 규제 개혁의 상징이 돼버렸다”고 썼다.
MB 스스로 아니라고 하니 전봇대 얘기는 이제 그만하자. 규제 개혁에 무슨 대단한 상징이나 멋들어진 구호가 필요한 것도 아니다. 간결하고 효과적인 해법도 있다. 변양호 등 전직 경제관료들은 2021년 ‘기준국가 선정을 통한 규제 완화’를 제시했다. 기준국가를 정하고 그 나라 수준으로만 규제하자는 것이다(『경제정책 어젠다 2022』).
영국 이코노미스트 최신호는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 당선인의 ‘1호 친구(first buddy)’인 일론 머스크를 ‘최고파괴책임자(disrupter-in-chief)’라고 명명했다. 정실주의와 이해 상충의 위험을 넘어 규제 개혁과 예산 삭감에 얼마나 성공할지 관심이 뜨겁다. 이왕이면 이런 미국을 ‘기준국가’로 삼아 우리도 화끈하게 규제를 없애 보면 어떨까. 전봇대 얘기는 이제 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