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향에서] 서울에서 만난 전북- 권율 장군

2025-04-08

약무호남시무국가(若無湖南是無國家). ‘호남이 없으면 곧 나라가 없는 것이다’라는 뜻입니다. 임진왜란 당시 삼도수군통제사이던 이순신 장군께서 사헌부 지평 현덕승에게 보낸 편지에 쓰신 글입니다. 임진왜란에서 조선이 무사할 수 있었던 건 곡창지대인 호남을 지켜낸 덕분입니다. 군량미를 지켜냄으로써 왜군이 식량을 조달할 수 없게 만들어 궁지에 몰아넣었던 것이지요.

당시 호남을 지켜낸 싸움이 이치전투와 웅치전투입니다. 충무공 3부작 중 2부에 해당하는 영화 ‘한산’에 웅치전투가 등장하는 이유이지요.

웅치·이치 전투는 1592년 음력 7월 완주와 금산의 경계인 배고개(梨峙)와 전주와 진안의 경계인 곰치(熊峙)에서 벌어졌습니다. 이치는 김제 군수 정담, 나주 판관 이복남, 의병장 황박 등이, 웅치는 임시 전라도절제사 권율과 동복현감 황진 등이 지켰습니다. 조선군은 수적인 열세에도 불구하고 목숨을 걸고 싸워 결국 호남을 지켜냈습니다. 왜군을 몰아낼 토대를 마련한 것이지요. 이후 권율 장군은 수원을 거쳐 한양을 탈환하기 위해 행주산성으로 군대를 움직입니다.

‘평양성에서 패한 왜군이 전열을 정비해 대규모로 쳐들어왔다. 조선군은 수적으로는 열세에 놓여 있었지만 지휘관인 권율 장군을 필두로 똘똘 뭉쳐 사기만은 하늘을 찌를 듯했다. 한참을 싸우던 중 화살이 떨어지자 부녀자들이 치마에 돌을 날랐다. 왜군에게 돌팔매질이라도 하는데 사용하도록 한 것이다. 결국 왜군을 물리쳤다. 그때부터 행주치마라는 말이 생겼다.’

제 기억으로는 초등학교 교과서에 이런 내용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서울로 유학을 온 후 행주산성이 어디인지 무척이나 궁금했습니다. 판문점 가는 길 쪽에 있다던데 도무지 어디인지 알 수 없었지요. 그쪽으로는 산성을 쌓을 만큼 높은 산이 전혀 없었기 때문입니다.

남원검찰청을 떠나 고양검찰청에 근무하게 되면서 행주산성의 위치를 비로소 알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좀 실망스러웠습니다. 명성에 비해 성의 규모가 너무 작은 것처럼 보였거든요. 서울에서 자유로를 따라 고양쪽으로 가다 보면 한강변에 외롭게 떠있는 조그마한 야산이 있습니다. 바로 덕양산이지요. 그 얕고도 조그마한 산에 행주산성이 있습니다. 그런데 실제로 행주산성을 올라가 보고 생각이 완전히 바뀌었습니다. 높이는 125미터에 불과하지만 천혜의 요새라는 걸 알 수 있었지요. 우선 3면이 강과 늪, 절벽으로 둘러싸여 있습니다. 그러니 군사가 진입할 수 있는 곳이라고는 서북쪽 능선뿐인 데다가 이곳도 좁디좁아 한꺼번에 대규모 병력이 진입하기 어렵습니다. 저 같은 문외한의 눈으로 보아도 적은 인원으로 많은 적을 격퇴할 수 있는 곳이라는 걸 금방 알 수 있었습니다. 

서울에서 권율 장군을 만날 수 있는 장소가 또 한군데 있습니다. 사직공원과 독립문을 연결하는 사직터널 위쪽 산기슭에 있는 장군의 집터입니다. 지금은 집 대신 500여년 된 커다란 은행나무 한 그루가 여전히 자리를 지키고 있지요. 덕분에 동네 이름도 은행나무 동네, 즉 행촌동(杏村洞)입니다.

공자가 제자들을 가르친 곳이 은행나무 아래라고 합니다. 때문에 예로부터 학문이나 학교의 상징으로 여겨져 향교나 문묘에 심었다고 합니다. 또 선비가 살던 집이나 별서 혹은 마을의 입구에도 은행나무를 심었다고 하는데요. 햇살이 좋은 날 행촌동 골목길을 걷다 보면 선비의 향기가 코끝을 스치는 걸 느낄 수도 있을 겁니다.

양중진 법무법인 솔 대표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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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에서 만난 권율 장군

기고 gigo@jjan.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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